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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6 00:02, 하자평화연구_Field

Eichmann in Jerusalem - Hannah Arendt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in Alexander Laban Hinton, Genocide: An Anthropological Reader

 

The Accused

 

아이히만은 부에노스 외각에서 1960년 5월 11일 저녁에 체포되었고, 9일 후에 이스라엘로 이송되었다. 예루살렘 지방법원의 재판에 15개의 기소항목으로 세워진 것은 1961년 4월 11일이었다. “다른 이들과 함께” 그는 유대민족에 대한 죄, 인도에 반하는 죄, 나치체제-특히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루어진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기소의 내용이었다. 각 기소항목에 대해서 아이히만은 “기소장의 의미대로라면 유죄가 아니다”라고 변호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가 유죄라고 생각했을까? 그의 변호인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히만은 법이 아닌 신 앞에서 유죄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피고측 변론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당시 존재했던 나치의 법률체계하에서 그는 그릇된 일을 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는 범죄가 아닌 국가의 행위에 대해서 고소된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국가가 재판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par in parem non habet jurisdictionem). 그의 의무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었으며, 그는 성공했다면 훈장을 받고 실패했다면 교수형에 처해질 행동을 했던 것이다.

아이히만 자신의 입장은 달랐는데, 먼저 살인죄에 대해서 부정했다. 그는 단 한명의 유대인도 직접 죽인 적이 없으며, 그 어떤 사람도 죽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유대인이던 유대인이 아니던 죽이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단지 그것을 하지 않았다 I just did not to do it." 그는 만약 명령이 있었다면 그의 아버지도 죽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계속 스스로가 오직 유대인들의 전멸을 돕고 지원한 것에 대한 죄로서 기소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는데, 이 죄는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큰 범죄 중 하나로서 다루어지고 있었다. 변호인측은 아이히만 스스로의 논리에 큰 무게를 두지는 않았지만 검사측은 아이히만이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사람을 스스로의 손으로 직접 죽었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시간낭비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정황들만이 나왔을 뿐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실제 아이히만은 군대의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며 내부의 복잡한 상황들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었다.

만약 그가 살인의 부속품으로서 기소당했다면 그는 유죄를 인정했을까? 그는 법을 지키는 시민이었고, 히틀러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일했으며, 제3제국 내부에서 법의 집행자였다. 아이히만이 당시에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은 당시가 어땠는가를 모르거나 잊은 이들이다. 그는 이후에 “언제나 저항했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한 명이 되길 원하지 않았으며 내려온 명령에 대해서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서 임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간은 변했고 다른 세상이 왔다. 그는 자신이 했던 것들을 부정하고자 하지 않았다.

변호사로부터의 큰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입장을 유지했다. 그는 질문받았다. “당신의 상관과의 논의에서 당신은 유대인에 대한 동정이나 그들을 돕기 위한 작은 노력을 행할 수 있지 않았나?” 그는 선서를 했기에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면서 히물러에게서 주어진 명령이었기에 성실하게 수행했고 추방과 이주는 자신이 전문가이었기에 스스로가 이 문제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재판동안 아이히만은 기소장에 따른다면 자신이 유죄가 아님을 계속 주장했다. 기소장은 그가 부인하지 않는 “의도적인 행위”였음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동기와 그의 행위가 가지는 범죄성에 대한 온전한 인지여부도 함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 개나 돼지같은 인간(독일식 비유표현 - 내 안의 돼지-개innerer Schweinehund)이 아니었고, 스스로의 양심에 따른다면 명령받은 일-그것은 수백만명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의 죽음으로 보내는 것일지라고-을 하지 않는것이 양심에 가책이었을 것이다. 6명의 정신감정사들이 그를 진단했지만 그는 정상이었다. 그가 그의 부인, 아이, 부모, 형제에게 보이는 태도는 정상을 넘어서서 모범적이라는 진단도 나왔다. 또한 그는 반유대주의자가 되지 않은 수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 반유대주의 미치광이insane hatred of Jews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 검사들은 그를 믿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의 직업상 그래야 하기 때문이었다. 변호인측은 아이히만과 다르게 양심의 문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재판관들은 인종주의자이거나 의지박약이거나 성격결함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 그런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에 대해서 믿지 못할 만큼 착했기에 그를 믿지 못했다. 그들은 피고인이 다른 모든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의 행위에 대한 범죄성을 인식했어야만 했다는 가정에 의지했다. 아이히만은 실제 나치체제 안에서 예외적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제3제국 하에서는 오직 예외적인 사람만이 “평범하게” 반응할 수 있다. 이 단순한 진실이 재판관들이 피하지도, 풀지도 못하는 딜레마를 만든 것이다.

 

Deprotation from the Reich - Germany, Austria, and the Protectorate

 

아이히만은 총체적인 혼돈이라고 스스로가 묘사했던 1942년 1월부터 1944년 가을까지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각 관료집단 간의 판단과 집행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가져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성과를 만들었다. 유대인을 추방시키는 데에 있어서 선결되어야 할 문제는 몇 명을 전멸시킬 것이며, 몇 명을 중노동을 위해 살려줄 것인가인데 이 역시 히물러에 의해 결정되었고 그러한 결정은 각각의 캠프과 관료들에게 신속하게 전달되어 수행되었다. 아이히만의 역할은 그러한 전체 운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컨베이어 벨트이다. 그의 부서가 몇 명의 유대인을 어느 곳으로 보낼지를 실제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출발과 도착에 대한 각각의 지역간 문제, 낭비없이 최대한의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것들이 고려되었고, 그러한 것들은 일상적인 업무가 되었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최종적 해결Final Solution”은 전쟁의 주된 목적중 하나였고 이것은 경제와 군사적 상황과 별개로 우선순위에 놓였다. 그리고 아이히만에게는 그것은 직업이었고 일상적인 업무였다. 유대인들을 말 그래도 세상의 끝으로 내쫓는 것이.

 

Judgment, Appeal, and Execution

 

1961년 6월 29일에 검사측은 논고가 끝났고, 변호인의 변론이 시작되었다. 8월 14일에 114개의 세션이 끝나고 핵심일정은 종료되었다. 재판부는 4개월의 휴정을 선언했고 12월 11일에 선고공판을 열었다. 이틀에 걸쳐 5가지 섹션으로 나눠서 3명의 판사는 2백 44개의 판결 영역을 낭독했다. 검사측이 제기한, 아이히만을 핵심 전범으로 만들 수 있고 자동적으로 최종적 해결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있었던 “음모”에 대한 부분은 빠지게 되었다. 재판부는 비록 몇가지 요소들은 무죄로 했지만 15가지 기소사항 모두에 대해서 유죄를 확정했다. “다른 이들과 함께” 그는 유대민족에 반하는 죄를 범했다.

이 죄는 민족을 파괴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with intent to destroy the people 유대인에 대해서 행해진 죄를 의미하는데 4가지 기소항목이 있다. (1) 수백 만의 유대인을 죽도록 한 것 (2) 수백 만의 유대인을 그들이 육체적 파멸로 이르게하는 장소로 내몬 것 (3) 그들에게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손상을 유발한 것 (4) 유대인 여성들에게 임심을 중단하게 하고 출산을 금지시키도록 지시한 것. 그러나 그들은 그가 총통의 명령을 받았을 때인 1941년 8월 이전에 베를린, 비엔나, 프라하에서 행단 그의 초기 행위들에 대해서는 유대민족을 파괴시킬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보고 무죄로 했다. 이것이 첫 4가지 기소 항목이었다. 5번째부터 12번째는 “인도에 반한 죄”를 다루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법에서 특이한 개념으로- 여기에 비유대인에 대한 제노사이드와 민족 전체를 파괴할 의도가 없이 행해진 유대인․비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살인을 포괄하는 기타 범죄 둘 다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1941년 이전의, 총통의 명령을 받기 이전의 유대인․비유대인에 대한 모든 행위는 인도에 반하는 죄로 뭉쳐진다. 또한 유대인에 대한 그의 이후 범죄들 역시 보통의 범죄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더해지게 된다. 5번째 기소항목은 1번 2번 항목과 마찬가지 범죄로 유죄이고, 6번째 항목은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 이유에서 유대인을 박해했기에” 유죄이며, 7번째 항목은 살인과 연관되어서 유대인의 재산을 약탈했기에 유죄이고, 8번째 항목은 전쟁시기에 저질러진 일들의 대부분을 “전쟁범죄”로서 다시금 정리했다. 9번째 항목에서 12번재 항목까지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범죄였다. 9번재 항목은 수천수백의 폴란드 인들을 그들의 고향에서 추방했기에 유죄이며, 10번째는 유고슬라이아에서 만사천여명의 슬라브인들을 추방했기에 유죄이고, 수천명의 집시들을 아우슈비츠로 이송시켰기 때문에 유죄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아이히만이 집시들의 이송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는가에 대해서는 증명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유대인에 대한 죄를 제외하고는 제노사이드의 책임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머지 3가지는 뉘렌베르크 재판에서 범죄라고 인정한 4가지 조직(SS, SD, the Secret State Police, Gestapo)의 구성원이었다는 책임이다. 첫번째 기소항목부터 12번째까지 모두 사형이 언도되었다.

아이히만은 그가 오직 돕고 지원한 것을 행한 범죄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고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처럼 대규모의 범죄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숫자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숫자에 대해서도 고려해야하며 그의 책임이 고려되는 한, 누군가가 실제로 희생자들을 죽인 살인자와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책임의 정도는 손에 흉기를 든 사람과 얼마나 떨어져있는가가 책임의 정도의 핵심인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후 재판은 판에 박힌 과정이었다. 검사측은 사형을 요구했고, 변호인은 피고는 국가의 행위를 수행한 것이며 이것은 미래의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그는 희생양으로서 이 자리에 있다고 했다. 또한 독일 정부는 국제법에 반하여 이 재판을 방관하고 있으며 이는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의 최후진술이 이어졌다. 정의에 대한 그의 희망을 무너졌다. 재판부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그는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는 결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인류의 학살자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의 유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으며 복종은 미덕으로 칭송받았다. 그의 미덕은 나치 지도자들에 의해서 악용되었던 것이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그는 ‘희생양’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대신해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깊은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근엄하게 교수대로 갔다. 그는 검은색 두건을 머리에 쓰는 것을 필요없다고 거부했다. 스스로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후면 우리는 모두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장례식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이야기했다. 이것은 그의 기억이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린 것이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은 채 당당했다.

이는 마치 그가 인간의 고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려운 교육, 말과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Postscript

 

출판도 되기 전, 나의 이 책은 논쟁의 중심이 되었고 조직적인 시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책의 이미지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었고 어떤 것은 내가 언급하거나 다루지도 않은 것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즉, 히틀러의 통치가 거대하고 전례가 없었던 범죄와 함께 독일인이나 전 세계의 유대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지배되지 않는 과거’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논쟁은 최종적 해결이 진행되는 동안 유대인이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는가 또는 보호했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검찰이 먼저 제기했는데 이는 당시에 대한 무지를 입증하는 것으로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논쟁의 결과 게토 심리라는 것이 도출되었는데 이는 유대인적 요소로 설명될 수 없는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반복해서 억지로 도입되었다. 이것은 책의 ‘이미지’에서 어떤 비평가들이 특정 이익집단에 의해 창안된 관점을 의도하지 않게 이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서 나는 유대인이 자기증오에서 스스로를 살해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되어있다. 이 외에도 유대인 지도자의 역할, 독일 레지스탕스, 재판석에 앉을 자격 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제한된 주제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재난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전체주의나 제3제국 시절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며, 악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연구도 아니다. 모든 초점은 개인의 역사, 특질과 고유성, 행동 유형, 상황 등 독특성을 가진 것들과 육신을 가진 한 피고인의 인격에 있다. 물론 다른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한 인간, 개인이 아니라 독일인 일반,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 근대사, 인간의 원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만약 피고가 상징적인 존재로 채택되었고 재판이 한 사람의 유무죄가 아닌 더욱 거대한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해서 진행되었다면 그가 희생양으로서 처벌받았다는 것이 일관성있다고 본다. 내가 이러한 관점을 공유했다면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재판이 오직 정의에 대한 관점으로 진행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판사들이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어 유대인의 국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따라서 유대인에 대해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사법권을 가진다고 강조한 것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처벌의 의미와 유용성에 대한 법조계의 혼란에서 본다면 처벌이 가해자로부터 상처받은 이들의 명예와 권위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필요하다는 언급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재판 자체를 넘어서서 피고인과 그의 행위의 본질이 일반적 본질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믿는다. 나는 진정한 논쟁이라면 이 책의 부제에 대한 것이 되었으면 했다. 나는 재판속에서 한 사람의 행한 현상을 사실적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른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동인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한 근면은 절대 범죄일 수 없다. 문제는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진한 무사고였다. 또한 그는 교수대 아래에서 자신이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을 말하면서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떨어져 존재한다는 것과 무사고가 인간에게는 다른 모든 악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예루살렘의 교훈일 것이며, 이것은 현상에 대한 설명이나 이론이 아니다.

이보다 단순한 것으로는 어떤 종류의 범죄가 여기에 개입되어 있는가가 있다.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범죄를 지칭하기 위해서 도입된 제노사이드 개념은 나름 의미가 있지만 민족 전체 에 대한 학살이 전례가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온전하게 적합한 개념은 아니다. 식민지 제국주의의 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시도들은 존재했다. “행정적 대량학살administrative massacres”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 표현은 이러한 야만적인 행위가 다른 민족이나 인종에 대해서만 저질러질 수 있다는 편견을 극복할 수 있다. 히틀러가 대량학살을 ‘치료 불가능한 환자’들에게 ‘안락사’를 허용함으로써 시작했고 ‘유전적으로 결핍이 있는 독일인’들을 제거함으로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이러한 종류의 살인이 어떤 특정한 집단을 지향할 수 있으며 이는 상황적 요인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최종적 해결이라는 기계에서 단지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의 이라는 변호인 측의 변론을 들었다. 물론 전체주의 정부의 본질과 모든 관료제의 본질이 기능인들과 단순한 톱니바퀴의 이로서 인간들을 비인간화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우리는 현대 관료제 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사회학에 의해 이러저러한 종류의 결정론을 중심으로 행위자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없애버리는 데 아주 익숙하게 되었다.

이 경우에 사법부는 이 문제를 다루는데 2가지 범주만을 이용할 수 있다. ‘국가의 행위’와 ‘상관의 명령이 의한’행위라는 개념이다. 이는 내 생각에는 모두 부적절하다. 국가의 행위 이론은 한 주권국가는 다른 주권국가에 대해 재판권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폐기되었다. 이는 이것이 받아드려졌을때 히틀러조차도 끌어들일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의미에서의 정의도 침해하는 상태가 된다.

국가의 행위 개념의 배후에 국가적 이유raison d'etat 이론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문제에 보다 더 본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 이론은 그 사건이 옳던 그르든 국가 자신의 생존과 합법성을 건 필연성에 호소하며, 그 이름으로 저질러진 국가적 범죄들은 귄력을 유지하고 따라서 기존의 법적 질서 전체의 영속성을 확실히 하려는 긴급 조치, 즉 현실정치의 긴박성에 따라 허용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재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어떠한 외부의 정치체도 한 국가의 존립을 부정할 권리와 그것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를 처방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범죄적 원리 위에 수립된 국가에서는 상황이 반전된다.

이 모든 재판의 중심 문제인 범죄적 사실들을 다루기에는 법적 개념들이 얼마나 부적합한가 하는 것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행한 행동의 개념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루살렘 법정은 명확히 범죄적인 명령들에 복종해서는 안된다는 독일의 군사 형법 규정을 이용했다. 그러나 불복종 명령은 ‘명백히 불법적인 것’이어야 한다. 불법성은 ‘금지’라는 경고문이 분명해야 하고, 병사들이 ‘분명히 불법적’이라고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법적 체계의 규범들을 위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인지해야 한다. 입법자들은 아마 장교가 정신이 돌아서 자기 부하들에게 다른 장교를 사살하라고 명령하는 장교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아이히만에게 적용한다면 그는 전적으로 그에게 요구된 판단 틀에서 행동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는 그 규칙에 따라 행동했고, 그에 따라 내려온 명령을 검토했다는 것이다. 그는 법을 잘 알았기때문에 그의 양심에 의지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상관의 명령’은 정상참작의 이유가 되고 실제 다른 이스라엘의 재판 예도 있었다. 만약 그에게도 정상적인 이스라엘 법 규정이 적용되었다면 최고형을 부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재판은 국가 기구에 의해 조직된 행정적인 대량학살의 사실을 다루는 데 현재의 법적 체계와 현대의 사법 개념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많은 예 중 하나이다. 판사들의 실제 신빙성 있는 기준들과 법적 절차에 따라서 재판하지 않았다. 이미 뉘른베르크에서도 판사들은 ‘평화에 대한 죄’를 가장 심각한 것이라고 말했으면서도 행정적 대량학살이라는 범죄에 참여할 피고들에게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간들은 자기를 이끌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판단 뿐이고, 게다가 그 판단이 자기들 주위의 모든 사람과 반대되어도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집단적 죄나 집단적 무죄 같은 것은 없다는 점에, 그리고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어느 한 개인은 유죄이거나 무죄일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이것은 집단과는 별개로 개인의 정치적 책임이 없어서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아니다. 모든 정부는 그의 선임 정부의 행위와 과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안으며, 모든 민족은 과거의 행위와 과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는다. 모든 세대가 역사적 연속성 속에서 탄생함에 따라 선조들의 죄에 의해서도 짐을 지게 되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책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은유적 의미에서만 그러한 이전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느 날 국가들 사이의 어떤 정치적 책임들이 국제 재판소에서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아주 상상 가능한 일이다. 상상이 가능하지 않은 일은 그러한 법정이 개인의 유죄와 무죄를 선언하는 것이다. 개인적 유죄와 무죄에 대한 질문, 피고와 희생자 모두에게 정의를 부여하는 행위는 행사재판소에서 문제가 되는 유일한 일이다. 아이히만 재판도 예외는 아니다. 비록 이곳의 법정이 법전에서 발견되지 않는 범죄, 그와 유사한 것이 적어도 뉘른베르크 재판 이전에는 어느 법정에서도 알려진 적이 없었던 범죄를 직면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보고서는 예루살렘 법정이 정의의 요구를 총족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는가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다루고 있지 않다.

2010/10/16 00:02 2010/10/1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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