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기억은 힘이 되고
임선수는 규칙적으로
분류_Category
이것이소개_about
마음의병_Diary
보내자원고_Column
나름아티클_Article
우리애기_Book
하자평화연구_Field
일단작품세계_Photo
생계형디자인_Design
기억력강화_Scrap
모른척해줘_missingyou
326586 Visitors up to today!
Today 50 hit, Yesterday 27 hit
2010/10/21 00:03, 보내자원고_Column

[제노사이드연구 5호 : 서평]


삶을 담는 연구의 방법론

허버트 허시.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삶을 위한 죽음의 연구>



임재성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삶을 보존하기 위한 연구

병역거부 관련한 운동에 참여하면서 글을 쓰거나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 주된 소재는 보통 지금까지 몇 명의 사람들이 감옥에 갔고, 몇 년 형을 받았으며, 지금은 몇 명이 수감되어 있는가가 된다. 그러나 이 속에서 병역거부자는 피해자로서만 대상화되고, 그 한 명 한 명이 왜 총을 들 수 없다고 결정했는지,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는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불쌍한 이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안쓰러움을 전달해주기도 하지만 이들이 가진 신념에 공감하지는 못할 수밖에 없다. 제노사이드를 연구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몇 명이 죽어야 제노사이드일까? 보도연맹의 희생자 숫자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숫자와 비교하면서 보도연맹 역시 이렇게나 ‘많이’ 죽었음에도 왜 가려져왔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이렇게 ‘숫자’로 환원된 고민 속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마을 학교 운동장을 불려가서 비명에 죽어야만 했던, 이 기막히고 원통한 사람들의 삶과 마음의 절절함을 담을 수 없었다.

허버트 허시Herbert Hirsch의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는 ‘숫자’로서, ‘과학’으로서 접근하는 제노사이드 연구로써는 그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제노사이드를 막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과학이 가지는 실증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타인의 고통과 생존자의 경험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가치지향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연구를 위해 그는 기억에 주목한다.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라는 책의 제목처럼, 제노사이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인 동시에 그것을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을 ‘기억’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책 전반을 통해서 그는 제노사이드를 막기 위한 대안 형성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삶을 위한 죽음의 연구”로 번역되어 있지만, 보다 온전하게는 “삶을 보존하기 위한 죽음의 연구(studying death to preserve life)" 라고 번역 할 수 있는 이 책의 부제는 이러한 관점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제노사이드 연구는 제노사이드를 멈추기 위함’이라는 허시의 관점은 제노사이드 연구의 의미 있는 방법론을 제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존자의 기억을 온전히 담기 위한 방법론

허시는 생존자의 기억을 통해서 폭력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기억의 정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대항적 방식의 또 다른 기억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데, 생존자들에 대한 공감과 동일화를 통해서 제노사이드의 실체를 직시하고 그것의 재발을 막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개개인의 기억이나 감정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구성된다. 따라서 기억은 권력과 개인 혹은 집단의 역학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기억은 대부분 현재의 사회 질서와 정책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된다. 따라서 ‘기억의 정치’라는 용어는 기억이 가진 권력 정당화의 경향과 함께 기억을 조작하는 능력 그 자체가 권력의 수단이 되는 것을 포괄하는 의미로 정의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기억의 정치’는 제노사이드 연구를 넘어서서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광범위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국민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살균되고 조작된 공통의 기억은 공인된 ‘역사’라는 이름으로 비균질적인 국민들에게 사회적 응집의 기반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이 때 전쟁이나 학살의 기억은 국민국가의 정당성을 형성함에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부분이기에, 권력은 이 기억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파시즘에 저항한 애국전쟁’이라고 명명된 제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소련의 기억 속에서, 소비에트 군대에 의해 저질러진 잔혹행위는 교묘히 삭제된다. 홀로코스트의 기억 역시, 현재와의 단절 속에서 ‘히틀러의 시대’에 일어난 예외적인 ‘사고事故’로서 인식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우리에게도 여순과 제주, 보도연맹과 노근리 다리의 슬픔이 권력의 조작을 넘어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게 되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허시가 주목하는 생존자의 기억은 이러한 살균된 기억에 맞서 배제되고 삭제된 것을 복원하기 위한 것일까? 물론 그는 이러한 생존자들의 생애사와 구술사를 통해서 가려진 역사의 복원이 필요함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생존자의 기억을 통해서 제노사이드 연구가 ‘인간적 차원’을 담아야 하며, 이를 통한 공감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사회과학 텍스트보다 대량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때문에 생존자의 기억은 제노사이드 연구가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된다. 생존자의 기억을 통해서 사람들은 감정이입을 통한 동일화라는 경험과 기억을 가질 수 있게 되고, “망각에 대항한 기억의 투쟁”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제노사이드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안하는 것이다. 기존 사회과학의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주류 제노사이드 연구는 인간의 경험과 기억을 비인간화시켜서 계량화된 자료로 축적한다. 그 속에서 ‘학살을 끝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가 보다, ‘하나의 사건이 제노사이드로 명명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혹은 ‘제노사이드에 대한 최선의 혹은 과학적인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것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게 된다. 이처럼 죽은 사람들의 ‘수’를 세는 제노사이드 연구는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폭력과의 틈을 매우기 위해서 ‘정치적 학살(politicide)'과 같은 새로운 개념을 등장시키며 ’과학적 엄밀화‘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진척되어왔다. 이 속에서 생존자들의 고통과 경험은 하나의 ’사례‘로 한정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감정과 느낌, 선과 악의 개념들은 모두 측정의 기법으로 환원되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과 공명하고 타자의 고통에 감정이입할 수 있게 하는 기억은 만들어질 수 없었고, 결국 숫자만이 남겨지게 될 뿐이었다.

허시가 제시하는 제노사이드 연구 방법론의 또 다른 차원은 연구자의 ‘탈(脫)객관화’이다. 그는 제노사이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그들이 관찰자의 입장에 서서 대상에 대해 심리적으로 마비되고 공포를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심리적으로 마비된 학자의 연구는 결국 인간의 이야기들이 제거된 연구를 생산할 수밖에 없으며 그 안에서 생존자의 기억은 온전하게 담길 수도, 공명을 추구할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리프턴Lifton은 “궁극적인 파괴의 형태에 직면해 전문적인 중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제노사이드를 피하기 위해서는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철저하게 이해해야만 하는데, ‘객관적’인 연구자의 위치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허시가 말하는 제노사이드의 방법론은 인간성에 가장 초점에 두면서 고통과 억압, 폭력과 부정의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공감의 기억’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때 생존자의 기억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고통과 비극에 가장 잘 공명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공명은 연구자의 차가운 손이 아니라 뜨거운 마음으로서 가능해진다. 진정 사람들이 제노사이드를 막기 위해 헌신하게 되는 것은 대량 학살로 죽은 이들의 ‘숫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가 전하는, “우리 모두가 게토에 있다는 사실, 그 게토에 담이 쳐져 있다는 것, 담 너머에 죽음의 신이 서 있다는 것,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열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비과학적인 통찰’을 통해서기 때문이다.



신성화된 기억의 함정

그러나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이 가진 한계를 비판하면서 허시는 생존자의 기억을 상대화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생존은 위해 투쟁하고 악의 목격을 견뎌낸 사람들은 영웅들이고 선지자들이었다”라는 생존자에 대한 허시의 관점은 이러한 편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생존자의 기억에 대한 베텔하임Bettelheim과 데 프레Des Pres의 논쟁을 평가하는 지점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베텔하임은 정신분석학자로서 스스로가 나치의 수용소를 경험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당시 수용자들의 심리를 분석한 저명한 연구자이다. 그는 실제 수용자들 사이에서 나치 친위대의 가치와 행동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상당했다고 주장한다. 데 프레는 이것이 생존자들에 대한 모독이며, 이들이 극한 상황에서 영웅적으로 대처했음을 강조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사실상 이 논쟁은 절멸 수용소라는 극한의 공간에서 생존을 추구했던 상황을 나름의 접근방식으로 분석한 논쟁이었고,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쟁점을 형성했다. 그러나 허시는 베텔하임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학문적인 측면을 넘어서서 도덕적 분노까지 내비친다. “(베텔하임의) 재구성이 생존자들의 행동이 유아적 퇴보, 가해자와 동일시, 그리고 수동성의 결과라는 시각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틀렸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영웅적 해방의 유일한 수단으로 찬양하는 기억을 만들게 된다. 데 프레의 시각은 삶을 긍정한다. … (베텔하임은) 항상 삶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프리모 레비와 같은 생존자들의 경험은 베텔하임식 정신분석 이론의 설명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면 강도가 적당히 조절된다.”

허시는 베델하임의 ‘협력’이란 단어를 문제 삼는다. 그것은 ‘협력’이 아니라 수용소라는 극단의 상황 하에서 생존 메커니즘이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냈고, 그 분리된 자아 속에서 엄격한 행동 통제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 속에서 이미 허시는 사실관계를 자체를 넘어서 영웅적 생존자들에게 어떻게 감히 ‘협력’이라는 더러운 규정을 붙일 수 있냐고 분노한다. 결국 그는 레비와 같은 영웅들의 신성한 기억이 상대화될 가능성이 있는 접근방식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렇게 허시가 보이는 생존자에 대한 영웅시는 역으로 아렌트Arendt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언급했을 때 직면해야 했던 비판을 연상하게 한다. 아렌트는 ‘악마’인 나치를 옹호한다는 비판에 직면했지만, 악은 예외적인 ‘외부’에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무심한 일상에서 발생한다는 깊은 통찰을 인류에게 주었다. 생존자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치에 협력했을 수도 있다. 물론 허시의 말처럼 이는 협력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고 봐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악이 평범하다는, 홀로코스트가 피비린내 나는 미치광이가 아닌 말쑥한 관료의 손에서 이루어졌던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생존자 역시 신성한 인류의 선지자로서가 아닌 살육의 공간에서 고통과 비극을 견딘, 본디 나약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으로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오히려 허시가 강조하는 제노사이드 연구의 ‘인간화’에 더욱 부합하는 방식이라고 보인다. 허시는 기억의 정치를 분석하면서 신화가 기억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설명했다. 마찬가지 논리로 정당한 학살이라는 신화를 생존자의 신화적인 내러티브로 극복하는 것은 일견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정당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죽이도록 만드는 기억 - 제노사이드의 메커니즘

생존자의 기억을 통해 제노사이드를 촉발하는 기억에 대항할 수 있다면, 과연 제노사이드를 가능하게 하는 기억 그 자체는 무엇일까? 앞서 허시가 주장하는 제노사이드 연구의 방법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인간화된 접근은 제노사이드의 메커니즘을 밝히는 과정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당시 사람들은 왜, 어떤 이유로 다른 이들을 죽이도록 동기화되었는가에서 분석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핵심에 조작되고 정치화된 ‘기억’이 존재함을 밝혀낸다. 조작된 기억의 형태와 역할은 살육을 행하는 주체의 측면에서 크게 도덕적 감정을 ‘마비’시키는 기억과 명령에 ‘복종’하게 만드는 기억으로 나누어진다. 이 두 기억이 상호작용하면서 제노사이드라는 반문명적인 사건이 우리 시대에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도덕을 ‘마비’시키는 기억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제노사이드의 대상이 될 사람들을 ‘비인간화’ 시키는 것이다. 나치는 오랜 반유대주의의 기억을 이용해서 유대인을 ‘사회의 해충’이라고 규정했다. 해충으로 규정된 유대인은 비인간화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위협이 되었고 그 속에서 이 위협을 제거하는 가해자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었다. 인간을 죽이는 것에 대한 도덕적 가책은 그것이 해충을 박멸하는 행위라는 인식 속에서 마비됐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기억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언어의 형태로서 개인에게 체험되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나치들은 유대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소독’하거나 ‘청소’한 것이라고 표현했고, 이러한 인식은 살인을 살인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마비를 영속화시켰다. 유대인을 절멸하는 행위는 ‘최종 결정(Final Solution)’의 집행이라 불렸다. 절멸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아이히만Eichmann이 재판정에서 자신은 결코 유대인을 죽인 적이 없다고 주장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마비의 언어로 포장된 기억의 결과라 할 것이다.

니체Nietzsche는 일찍이 우리가 어떤 것을 칭하는 방식은 실제 그것이 어떤 것인가 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나치의 ‘최종 결정’만큼 니체의 통찰에 극적으로 부합하는 사례가 또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최종 결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상 속에 존재한다. 허시는 ‘전쟁부’를 ‘국방부’로, ‘전쟁비’는 ‘방위비’로 표현하는 것 역시 고도의 정치적 수사라고 말한다. 그 속에서 군대와 무기는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닌 국방과 방위를 위한 것이 되고, 이에 대한 비판과 개입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 병역거부운동이 등장했을 때 병역거부자들은 ’군사훈련‘을 ‘살인훈련’이라고 표현하며 신념에 따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엄청났는데, 어떻게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살인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언제나 국가와 공동체를 지켜온 군대라는 기억이 총을 쏘는 것은 살인훈련이 아닌 정의로운 그 무엇으로 인식시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군인이 사람 모양의 과녁에 총을 겨누면서 그것이 살인훈련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다. 가스실의 버튼을 누르고 죽어나가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수용소의 관리자가 그것이 학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비의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아를 분리가 나타나게 된다. 실제 유대인 절멸에 참여하는 나치의 의사들이 자아를 분리시켜서 한 편에서는 학살자로 다른 한 편에서는 따뜻한 부모의 역할을 하면서 자아의 도덕적 붕괴를 피했다. 허시는 징집 의례를 통해서 이러한 자아의 분리를, 그리고 그렇게 분리된 자아가 어떻게 복종을 받아들이는 가를 분석한다. 신병훈련이 주는 정신적·육체적 모욕은 ‘민간인’과는 다른 ‘군인’으로서의 자아를 형성시킬 수밖에 없게 한다. 이 모욕 속에서 자존심이 철저하게 파괴된 군인으로서의 자아는 무너진 자존심의 자리에 복종을 심게 된다.

복종은 제노사이드를 가능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다. 거의 대부분의 제노사이드는 국가 혹은 조직된 권력에 의해서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승인된 복종 범죄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렇기에 폭력 행위는 권위(명령권자)에 의해 정당화되며 관료화된 체계 속에서 책임은 쪼개지고 그 궁극적인 결과에 대한 관심은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 때 기억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와 명령을 통한 행위는 책임일 필요가 없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 속에서 군인들은 명령받은 행동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존재들로 만들어지며, 그 명령의 결과가 파괴적이라 해도 복종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허시는 국민국가의 조작된 기억, 도덕적 마비와 복종과 같이 제노사이드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변수들을 이전의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기억’이라는 코드를 통해서 성공적으로 분석해 나갔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생존자의 기억을 담는 새로운 제노사이드의 연구 방법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결론부분에서 “생존자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억에는 반드시 정치적 행동이 따라야 한다”고 선언하는 단절을 보여준다. 이 단절은 ‘강력한 국제기구 설립’과 ‘인도적 개입’과 같은 뜨거운 쟁점을 날 것 그대로 꺼내놓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는 그가 주장한 ‘제노사이드 연구는 제노사이드를 막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연구의 가치지향성이 만든 조급증이라고 보인다. 이 속에서 결론으로서 제시된 조급한 정치적 실천들은 결국 연구의 통일성을 해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도 충분한 근거를 담고 있지 못하고 있다.



조급한 정치적 실천

물론 허시가 ‘삶을 보존하기’라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제시하는 대안들 중에서는 전체적인 맥락을 이어가는 내용도 존재한다. 뉘른베르크의 원칙을 통해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복종 범죄를 거부하고 개개인이 양심을 자각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복종의 사슬을 끊는 방식으로 “개인적인 책임감”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규약상의 의무가 있는 국제주의(covenanted internationalism)'로서 개념화된다. 즉, 민족주의라는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이제까지 제노사이드의 가장 주요한 동력이었으며 그 속에서 개개인의 삶의 가치는 민족, 성별, 인종에 따라서 상대화되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경계를 뛰어넘어서 모두에게 보장되는 인권의 가치를 가장 우선에 놓고, 국제주의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사회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 제시과정에서도 앞서 제노사이드의 메커니즘을 살피며 보여주었던 면밀한 검토는 부재하다. 민족주의가 작동하는 다양한 기제에 대한 분석 없이 ’국제주의‘를 교육해야 한다는 것은 순진한 선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러한 조급함이 가장 적나라하게 보이는 부분은 강력한 국제기구의 설립과 그를 통한 인도적 개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물론 이 쟁점에 대한 찬반 논쟁이 치열함은 허시도 언급하고 있으며 그 대략을 검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논쟁을 자신의 관점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제노사이드를 막아야 한다’는 당위만을 강조한다. 제노사이드 협약의 문제점은 세밀하게 검토하지만, 결국 이러한 협약으로는 제노사이드를 막을 수 없다는 회의주의로 결론지으며, “폭력이 중단되어야 한다면 영구적인 국제 제도가 발전해야 하고 권한을 가져야 하고 운용되어야 한다”는 거친 주장을 내놓는다. 논리는 더욱 극단으로 치달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공동체는 용인할 수 있는 행동의 기준을 만들고 부과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 (세계는) 인간 폭력의 소용돌이에 균열을 만들 권한이 부여된 국제기구에 국가의 주권과 권력을 양도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기회를 가지고 있다.”

허시가 스스로 밝히지는 않지만 그가 칸트Kant의 영구평화론에서 지독한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칸트가 가졌던 공백 역시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압도적 권력차이가 존재라는 현재의 국제사회 속에서 탄생한 보다 강력한 국제기구는 과연 누구의 이익을 지킬 것인가? 또한 새로운 국제기구에 권력을 양도하자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일찍이 홉스Hobbes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 리바이어던에게 권력과 폭력수단을 넘기자고 했다. 그 결과가 폭력의 독점체인 근대 국가의 탄생이고, 유래 없는 전쟁과 학살이었다. 중세 시대와 같은 사적 폭력의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었지만 결국 우리가 마주하게 된 것은 독점된 폭력이 만드는 제노사이드였던 것이다. 이것에 대한 면밀한 반성과 검토 없이, 근대 국가가 독점한 폭력을 다시 국제기구로 넘기자는 제안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허시는 이후에 <반(反)제노사이드>란 책에서 이 책에서 단편적으로 제시한 대안들을 보다 구체화시키기에 이러한 평가가 온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반(反)제노사이드>에서 제노사이드를 막기 위한 정치제도의 변화에 착목하고, 실제 미국 내에서 벌어졌던 사회운동을 연구함으로서 국제적 영역에서의 ‘방지’의 정치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를 살핀다. 이러한 접근은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과도 매우 긴밀하게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하나의 책 속에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허시의 조급함이 더욱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죽은 자의 이름을 가슴으로 새기기

이 책에서 보여준 당장의 대안에 대한 조급함이 허시가 제안한 방법론의 의미 자체를 퇴색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시 생존자들의 기억을 중심에 두는 그에게로 돌아가보자. “생존자의 가장 강력한 이야기만이 현재도 진행 중인 잔학 행위에 자신이 손상되지 않는다고 여전히 믿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감정이입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들이 느꼈을 아픔과 처절함에 대한 공감은 여전히 유효한 제노사이드 방지를 위한 연구의 전략이다. 만약 우리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이 총알이 관통할 이의 고통을 느낀다면, 과연 우리는 총을 쏠 수 있을까. 우리가 쏘는 이들이 누구의 친구, 누구의 자식, 누구의 부모라는 것을 안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정의롭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상처받고 부끄러워할 수 있다면 최소한 우리는 스스로가 위험한 존재가 될 가능성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자’ 레비는 정작 위험한 것은 괴물이 아니라 의심도 품어보지 않고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 인간들이라고 했다.

이 공감은 보다 절박해질 수도 있다. 도미야마는 <폭력의 예감>에서 “이스라엘 전 수상이었던 샤론이 자행한 학살을 목격한 자들은 왜 스스로가 무장 헬기의 표적이 되지 않는지, 앞으로도 표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생존자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왜 스스로가 살아있는지, 앞으로도 살 수 있는지를 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절박함 속에서 공감은 저항의 힘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연구서들이 20세기를 ‘제노사이드의 세기’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21세기는 ‘제노사이드의 세기’가 아닐 것인가? 현실은 부정적이다. 이미 우리는 수단 다르푸르 등을 통해서 제노사이드의 20세기가 지속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지속되는 학살의 세기에 제노사이드를 연구한다는 것은 가장 무거운 질문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왜 당신의 연구는 제노사이드를 멈추지 못하는가. 그것이 바로 허시의 물음이다. 죽음의 연구는 더욱더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연구는 학살의 역사가 가지는 무게만큼 긴 호흡과 무뎌지지 않는 마음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허시는 정통 필사자들이 성경을 필사할 때 ‘거룩히 빛나는 하느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멈추듯이 생존자들의 문헌에서 죽은 자들의 이름과 아이들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멈춰가면서 필사한다면, 비로소 우리는 가슴으로 그 단어를 알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견 신화적으로도 읽힐 수 있는 표현이지만 ‘행동이 필요하다’는 당위 위에서 반복되는 ‘인도적 개입’보다 훨씬 큰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느껴진다.

2010/10/21 00:03 2010/10/21 00:03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펭귄 | 2010/10/22 21:26 | PERMALINK | EDIT/DEL | REPLY
흠.... 재미있군. 심심할 때 읽을 게 많아서 좋아.
사회학과 박사과정이라는 괄호안의 설명이 아주 무게있게 다가오는군..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