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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21:44, 기억력강화_Scrap

미국 패권주의와 평화론



이대훈(참여연대 협동처장)


제가 오늘 드리는 말씀의 출발점은 국제정치를 보는 기존의 관점을 뛰어 넘어보자는 것입니다. 척도나 근거를 뛰어넘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모습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미국의 패권 문제를 모아보고 그 안에서 이것이 극복될 수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국제정치를 다루는 언론이나 학계, 이른바 전문가들이 속임수를 비판하는 데 훨씬 관심을 가집니다. 그들의 언어를 똑같이 사용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속임수를 파헤쳐 그 허구성을 드러내는데 훨씬 더 관심이 많습니다.

국제관계에서 전쟁과 평화에 대해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것과 평화운동을 직접 하는 사람들의 것을 대비시키고자 합니다. 저는 평화운동을 하는 분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기이겠지만 패권의 인간적인 측면에서 출발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국 패권이라고 하면 군사적인 면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경제적 장악력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전 세계에 존재하는 친미세력의 분포에 관해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국제정치 전문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것이 미국의 힘이고, 청와대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만, 여기에 따라서 실용주의적인 입장에서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패권과 우리가 보는 평화는 어디서 출발을 하냐고 하면 당연히 인간에서 출발을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라크 전쟁 때 폭격으로 발목이 짓이겨진 이라크 소녀를 안고 있는 이라크 할아버지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짓이겨진 발목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폭격으로 죽거나 다친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시고 계실 겁니다. 국제정치에서는 항상 전쟁과 폭력이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피해자들이 항상 있어왔습니다. 가까이 있을 때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지만 멀리 있을 때는 또 잊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국제정치의 실제 모습인 것입니다. 전쟁으로 점철된 국제정치, 그것이 민중에게 다가오는 모습은 바로 자기 주변에서 폭격을 맞고 죽은 사람들, 전쟁터에서 실종된 사람들, 불구자가 된 사람들, 피난민의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국제정치의 전문가들, 전쟁 전문가들은 그런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다루는 소위 전문가들의 영역이라는 것은 침묵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의 모습에 대한 침묵.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인간이 아닌 것을 살아있는 실제처럼 묘사를 하는 것이 이들의 첫 번째 속임수입니다. 예들 들어 미국 패권이라고 하면, 미국이라는 어떤 거대한 기구와 국가, 권력체계, 그리고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들, 이것이 미국인 것처럼 우리는 연상하게 됩니다. 패권이라고 하면 거기서 움직이는 전투기, 탱크, 군함, 항공모함, 그리고 어떤 지역에 쳐들어가는 전투의 모습, 잘생긴 백인 병사가 이라크의 유전 지역 앞에서 깨끗한 복장, 깨끗한 모습으로 지키고 있는 사진들이 타임지를 비롯한 국제 언론을 장식하게 됩니다.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은 침묵으로 밀려나고,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들이 마치 국제정치를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우리가 패권 문제를 논의하면서 제일 먼저 강조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침묵 당하고 있고, 어떤 것이 살아있는 것처럼 인위적으로 형상화되어서 침묵 당하고 있는 것이 정당화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것과 죽음에 대한 속임수입니다.

그 다음에 침묵을 대표해서 동원되는 것이 숫자들입니다. 미국의 군사력이 어떻고, 미국의 국방비가 2003년도에 전 세계 국방비의 37%를 차지하고, 앞으로 4년 후 2007년도에는 전 세계 국방비의 50%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과연 누가 대적을 할 것인가? 경제면에서 특히 숫자가 많이 동원이 됩니다. 세계 몇 대 기업의 몇 퍼센트가 미국 기업이라든가, 미국 경제가 장악하고 있는 세계의 부가 몇 퍼센트라든가, 생산하고 있는 것이 전 세계의 30%, 40%라던가, 석유 세계 소비량의 몇 퍼센트가 미국의 몫인가. 이런 수치들을 동원함으로써 규모의 힘으로 저희를 압도합니다. 여기서도 과연 침묵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경제력, 군사력을 말할 때 그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침묵되고 있고, 그것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공장이나 생산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착취의 모습들도 침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산업이 가져오는 환경 문제도 침묵되고 있습니다. 이런 수치를 동원한 경제에서도 역시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은 침묵이 되고, 권력의 모습만을 부각시키려는 언어 전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미국 패권을 거대하게 형상화하게 되고, 특히 9.11 테러 이후의 미국의 변모해 가는 모습, 점점 일방주의로 나오고 군사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저희는 간과하게 됩니다. 여기서도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미국의 일방주의, 군사주의, 패권주의라고 말을 합니다. 이러한 말을 계속 쓰다보면 반복의 과정에서 이것이 실제인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여기서도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패권주의라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을 따져볼 때, 과연 미국이 자기 혼자 세계 정치를 마구 주무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동북아에서 미국이 일본의 도움 없이 그런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는가? 유럽에서 나토의 경제적, 군사적, 사회적 동의 없이 강제로 할 수 있는가? 실제로 이번 전쟁에서도 미국이 영국의 지원 없이 혼자서 그토록 자신감 있게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는가?

일방주의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이 동맹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미국이 동맹국을 끌어낼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한 문제이지, 미국이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선언은 아닙니다. 일방주의에 관해서도 미국이 동맹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에 와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독일, 혹은 이번 전쟁 중 유엔안보리에서 강력하게 반대했던 아주 작은 나라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앙골라, 카메룬, 기니아 이런 나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나라들은 우리보다 훨씬 국력이 거의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약한 나라이고, 그 나라의 달러 수입이 거의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그런 나라들입니다. 이런 나라들이 원조를 안 주겠다는 유엔안보리 골목에서의 협박을 무릅쓰고 이라크 전쟁은 불법이라고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프랑스나 독일의 슈뢰더 같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프랑스 정부나 독일 정부가 과거 핵무기 실험을 하면서 태평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압박하고, 그린피스 대원들을 죽였던 사실을 상기해 볼 때 결코 평화적인 나라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다시 말하면 일방주의, 패권주의보다는 그 한계, 그 한계 속에서 움직이게 되는 취약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패권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여러 가지 속임수가 담겨져 있습니다. 패권이라는 것이 군사적인 것이 전부인 것처럼, 주목을 끌 수 있는 힘이 전부인 것처럼 뉘앙스를 가지고 있고, 유럽어를 한자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패권이라고 하면서, 패자 즉 승자가 누리는 권력이라고 번역이 되어서 이것을 권력의 ‘권’이라고 우리가 형상화합니다. 그런데 패권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미국의 전략가들이 많이 고민을 하는 바이지만, 로마 제국과 같은 경우 로마의 패권 권력이 유지되는 동안 핵심적인 것이 로마인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로마 시민권과 로마인들의 자유를 주면서 그 사람들을 포섭해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로마의 법, 제도, 문화에 동경을 하게 만들고, 더 로마인이 되고 싶다는 자발적인 지지를 끌어내어서 로마제국이 유지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면 패권을 유지하는 속에도 패권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동의 없이는 권력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람시와 같은 좌파적인 분석가들이 이야기 할 때는 민중의 동의 없는 권력 행사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합니다. 한편에서는 법을 주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발적으로 동의를 끌어내야만 권력이 유지가 됩니다. 패권이라는 말을 설명을 할 때에도 언론을 휩쓰는 미국에 대한 설명방식을 벗어나서 과연 미국이 얼마나 전 세계에서 자발적인 동의를 얻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최근 몇 년간 계속 이 질문에 관해 만나는 사람과 대화했습니다. 운이 좋아서 대단히 많은 나라의 사회 운동가들과 이런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을 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제3세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개발도상국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나라, 그것이 아프리카가 되었든, 아시아가 되었든, 중남미가 되었든, 중동이 되었든, 거기에 가서 그 사회의 엘리트층이 아닌 사람들과 길거리에서 만나서 미국식 생활방식, 미국의 가치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코웃음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저희가 지난 세월 한국 사회에서 미국에 대한 선망의 문화, 그리고 그 속에 깔려 있는 미국식 자유와 민주주의, 그 당시 민주화 운동에 많이 스며들기도 했던 그런 미국식 가치에 대한 믿음과 비교를 해 볼 때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비웃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세계의 제국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따듯하고, 뭉클한 감정을 유발하지 못하고 유지가 될 수 있는가, 군대를 통해 통치를 할 수 있는가 입니다.

그밖에도 불신의 요소는 많습니다. 계속 거짓말을 하고, 겉으로 말하는 것과 실제 전략문서가 다릅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전략문서에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미국의 이익은 다른 나라와 동일할 수 없는 것이므로 강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수세기에 걸쳐서 미국의 전략문서에 쓰여져 나온 것인데, 외교는 그렇지 않은 이율배반, 이중의 가치, 이런 것들이 드러나면서 미국에 대한 배신감, 불신을 뛰어넘어 이제는 코웃음, 비웃음까지 치고 있습니다. 국제정치는 패권체제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패권체제에 대해 논의를 할 때에 먼저 패권체제의 취약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패권체제의 취약성이라는 것은 지적인 관심사라거나 따져보기 위한 관심사라기보다는 저희가 국제정치를 보는 시각이 전문가들이 보는 시각과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힘의 체제 속에서 피해자가 된 사람들과 연대를 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고, 그 사람들의 아픔을 느끼는 저희들의 마음이 대단히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분석은 바로 취약성이라는 부분에서 출발합니다.

지금의 미국 체제, 팍스아메리카나라고 하는 미국 체제에서 세 가지 위기가 심각하게 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경제권에서 말하는 장기 불황, 자본 축적의 위기입니다. 더 이상 생산을 통해 자본주의를 정상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이윤을 창출하기에 한계에 봉착한, 공장을 돌리는 생산적 산업의 이윤율이 3%, 2%, 1% 대로 떨어지면서 돈을 만들어낼 구멍이 점점 적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다른 비상적인 조치를 통해서만 이윤을 생산할 수 있는 자본 축적의 위기, 이것이 첫 번째 위기입니다.

그 다음 그것이 한국의 80년대 90년대 그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혹하게 했던 이념이 있었는데, 그 이념의 위기가 오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 계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신자유주의 이념이라고 표현되는 기업의 자유를 극대화시키고 자본 이동의 자유를 극대화시키며 자본가가 노동자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극대화시킴으로써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가능성을 높이고, 임금이 싼 노동력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쉽게 함으로써 계속해서 선진국 자본을 늘입니다. 그 다음에 이른바 돈 놓고 돈 먹기, 카지노 자본주의의 전형으로서 금융자본의 자유를 이어가는 것. 이것을 이념화해서 자본을 관리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이념이었는데, 이 이념 자체가 지금 십 수년간의 반세계화 기운에 의해서 계속 붕괴되고, 지지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기업가들의 회의가 대규모 저항 시위에 의해서 마비 당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통제력의 위기입니다. 통제력의 위기란 아까 말씀 드렸듯 이번에 프랑스와 독일 등 동맹국의 반발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친미정권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폭력적으로든 비폭력적으로든 미국 체제에서 이탈하려는 실천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점들이 상당한 수준까지 와 있고, 그 일부가 소위 말하는 미국에 대한 테러 활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대한 이슬람권의 이반이 나타나고 있으며, 중남미에서는 브라질의 노동당 당수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고, 아르헨티나에서도 이번에 미국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려는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았으며, 베네수엘라에서도 석유자본을 미국 마음대로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가진 차베스 정부가 정권에 들어서 있습니다. 다른 몇몇 나라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나오고 있습니다. 남미의 경우 197년대 80년대에 나타났던 기업적 반미 전성이 재가동 되고 있습니다. 물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런 기운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도 유엔을 통해서 계속 미국에 반대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유엔 총회를 가보면 어떤 괜찮은 결의안이 통과가 되면 항상 반대표가 한 표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입니다. 그리고 친미 정권들의 기권표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대다수 개도국이나 가난한 나라들의 찬성표들이 있습니다. 이런 가난한 나라들이 계속 유엔이나 국제 기구를 통해서 미국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이라크 전쟁 때 과거 국제 정치에서 볼 수 없었던 그런 난쟁이들의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징후들은 과연 어떤 것을 설명하고 있을까요?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미국이 이런 나라들을 매수하거나 협박하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동의하게 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집단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한 정도로 상실하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위기를 통해 미국 체제의 취약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취약성에 공통의 바탕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천과 저항입니다. 저항의 실천이 여론을 움직이게 되고 국경을 넘어서 신자유주의 문제나 미국 거대기업의 횡포 같은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제의 위기의 근저에는 저항, 국경을 넘은 저항이 있다는 점을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위기라고 하는 주장이 있을 수 있는 반면 위기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미국체제의 취약성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제 나름의 징표들을 몇 가지 제시하겠습니다. 한 나라 정치도 마찬가지로 그렇지만 정부를 국민 다수가 지지를 하게되면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 대단히 쉽습니다. 정책을 수행하는 데 큰 저항이 없습니다.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 선동을 해서 국민들을 과도하게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언어로 설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지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편법을 써야 합니다. 그 편법이 바로 군사적인 방법이고, 그리고 대단히 공격적인 언어를 통한 외교이념의 등장입니다. 그것이 소위 미국의 럼스펠드, 딕 체니, 국방부 차관으로 있는 월코비치, 이런 매파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신보수주의자, ‘네오콘’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똘똘 뭉쳐서 요직을 장악하고 미국의 정책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거의 평균적인 외교 언어를 넘어서는 공격적인 표현입니다. ‘우리편 아니면 적’과 같은 표현에서도 나타났고, 프랑스와 독일이 미국에 반대하자 ‘낡은 유럽’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외교가에서는 ‘쓰레기 같은 유럽’이라는 표현과 맞먹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다른 나라 정부의 보좌관이나 비서관들을 정서적으로 반박하면서 ‘박쥐같은 놈’, ‘머저리 같은 놈’과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이 실제 현실에서 정상적인 정치가 돌아가지 않을 때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이념적인 드라이브와 군사력을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합의, 토론, 결의안, 결정, 가령 유엔 결의안, 유럽 연합의 결정, 나토의 결정과 같은 민주적인 절차보다는 언어적인 공격, 군사적인 공격을 쓴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책이 잘 돌아가게 되면 하나를 하게 되고, 그것이 징검다리가 되어 다음 것을 하게 됩니다. 정부 재정을 늘리면 복지 재정이 늘어나고, 복지 재정이 늘어나면 고용이 원활해지고 하는 징검다리 효과가 정책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정책이 잘 안 돌아가게 되면 이것이 어긋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라크 전후 복구 계획에서 소위 온건파들은 대대적인 자금지원을 하고 맥아더가 전후 일본에서 했던 것처럼, 그리고 미국이 전후 독일에서 했던 것처럼 신마샬 플랜을 해서 경제 개발 지원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민주정치를 도입하고, 극단적인 정치세력들을 미리 배제를 해서 온건한 사람들이 정치를 할 수 있는 정지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할 이유도 없겠지만, 왜 할 수가 없냐면 지금까지의 미국의 경제정책이 신자유주의 정책이라고 해서 정부 재정을 축소하고 기업이 민영화해서 마음대로 하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마샬 플랜을 하게 되면 그것을 일정한 정도로 이라크 통치 과도 정부가 기업을 관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지금껏 추구해온 경제 정책과 맞지가 않게 됩니다. 이라크를 안정화 시켜도 자신들을 안정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결국 석유 사업을 기업에 떠넘기는 식으로 민영화하게 되니까 이라크 국민들이 반발을 하고, 바로 미국은 나가라는 식으로 나오게 됩니다. 아프가니스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카불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정부 상태와 다름없습니다. 종족별 지배 상태가 되어 방치되어 있습니다. 이라크 역시 바그다드를 비롯한 몇 개 도시를 제외하고는 무정부 상태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전후 계획 자체가 없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사태가 미국의 의도가 항상 사악하기 때문에 사악한 결과가 나온다는 쪽으로만 해석하는 데는 유보적입니다. 사악한 의도가 있어서 사악한 정책을 관철시킨다는 것은 미국의 권능이 그만큼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되는데, 저는 오히려 이런 점들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은 그 속에서 정치를 안정화시키고 중동지역을 통제하고 싶어도 자기네들 안에서 정책이 좌충우돌하기 때문에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어렵게 이야기하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간에 충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군사력이 동원되고, 외교가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데, 뒷받침이 전혀 되고 있지 않습니다.

덧붙여 이념적 드라이브의 경우 몇 가지 예를 들면, 최근 네덜란드에서 국제 민간단체들과 민주적 정부들이 노력해서 유엔을 통해 새로 생긴 국제형사재판소가 있습니다. 이 국제형사재판소가 인권 운동이나 평화 운동에서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범을 바로 처벌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가입한 국가들에만 처벌을 할 수 있고, 미국은 아직 가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범 문제에 있어서 만은 국제적으로 굉장히 강력한 기구입니다. 여기에서 이번 이라크전이 전쟁범죄이고, 따라서 미국과 영국, 그리고 미국을 지원한 한국 정부를 전범 혐의가 있어서 조사하겠다, 제소까지가 아니라 조사하겠다고 만 나와도 국제적으로 굉장히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것이 ITC에서 비준을 하지 않은 나라, 대표적으로 미국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나라까지 전범의 혐의가 있을 때 조사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논의가 있었을 때 미국의 고위 관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제형사재판소가 소재하고 있는 네덜란드는 미국의 군사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라크전 발발 4일 전에 수십 개 국가가 모종의 반미음모를 유엔에서 꾸미고 있었습니다. 유엔 총회에서 유엔안보리의 결의를 능가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행되고 있는 전쟁에 대해서 비상 결의안을 내어서 그 전쟁이 불법이므로 중단하도록 하는 유엔 총회 결의안을 낼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비상 결의안인데, 최소한 20~30개 국가가 이것을 추진하려고 논의를 하고 메모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월 18일에 미국에서 협박성 메모를 다 돌렸습니다. 유엔 총회에서 이 안건이 논의되는 것 자체를 미국 이익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라크에 대해 했던 바로 그 표현입니다. 이라크에서 생화학 무기의 개발이나 대량 살상무기의 개발은 미국 이익의 중대한 위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표현을 쓰면서 협박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앞뒤가 안 맞고, 갈 데까지 갔다고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징표를 말씀드리면 이라크전에 대한 일반적인 판단 중의 하나가 중독 지역의 석유를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 운동 구호 중에 ‘No Blood for Oil', 석유 때문에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구호를 가지고 반전 운동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판단도 부분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70년대 석유 파동 이후로 미국이 석유 수입선을 다변화했기 때문에 이라크에서 석유 생산에 차질이 있어도 당장 몇 년간 크게 위기가 오지 않습니다. 석유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석유에 달러가 연동되어 있다는 겁니다. 석유 가격을 통제하는 것이 미국의 달러는 통제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달러 통제 문제는 항상 관심사이니까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알게 모르게 달러가 굉장히 약해져 있고, 석유 가격의 변동에 따라서 달러가 요동을 치게 되면 미국의 경제 통제력이 상당한 정도로 위기가 오게 된다는 것이 대부분의 석유를 중심으로 한 경제 분석가들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저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4대 산유국에 들어가는 베네수엘라 같은 경우 차베스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부터 제3세계 국가들에서 석유를 현물로 결재해주기 시작했습니다. 달러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그만큼 약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경우, 아마 앞으로 미국 다음의 최대 석유 수입국이 될 예정인데, 2001년도에 보유하고 있는 달러는 대부분 유로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북한은 작은 나라지만 작년 악의 축 선언 이후에 외환 결재를 유로로 전환하겠다고 했습니다. 달러를 유로로 바꾸겠다는 정책변환을 베네수엘라에서부터 이라크, 이란, 인도네시아 등이 올해 선언을 했습니다. 이는 경제 전쟁으로 본다면 달러 대신에 유로화의 경제력을 만들어 냄으로써 미국의 거품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달러에 도전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성공할 것인가 아닐 것인가에 대해서는 경제 전문가들마다 견해가 다르고 제가 경제 전문성이 없어서 말씀은 못 드립니다만, 이런 나라들이 감히 그러한 도전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라크는 이제 달러화가 되었습니다. 점령을 당했으니까. 이란은 이미 달러화를 사용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지금 중동을 쳐들어 간 것은 석유를 장악하는 것 못지 않게 미국이 달러화를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러와 석유를 장악함으로써 여기에 도전하려는 중국, 러시아, 유럽, 중남미 국가들에 대해서 효과적인 통제력을 다시 한 번 갖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성공하겠느냐 아니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절박할 정도로 유엔까지 무시하고, 안보리에 결의안을 냈다가 철회했다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고, 이라크가 적이니 아니니 온갖 근거를 다 대고, 거짓 정보 공작을 하고, 이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전세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전쟁을 하는 대는 그만큼 절박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미국의 모습은 자신감 있는 모습이 아니라 절박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절박한 상대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절박한 상대는 좌충우돌하게 됩니다. 절박한 상대는 앞뒤가 안 맞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잃습니다. 저는 이 점을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체제의 취약성은 반세계 운동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규모만 상기를 해보면 반미 운동의 경우 7,80년대 냉전의 영향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좌파들의 영향력이 제3세계에 확대되면서 큰 물결이 일었습니다. 그 이후에 1990년대에 보면 미국에 반대하는 행동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어떤 한 도시에서 수백 명, 수천 명 정도의 규모가 미국 정책을 비판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예를 들면 90년대 초반에 유럽 각지에서 제3세계 외채 문제에 대해서 국제적인 회의를 하고 미국의 외채 정책에 대해서 비판하는 시위를 할 때 수백 명, 수천 명 규모였습니다. 이는 90년대 중반까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이 98년도에 런던에서 처음으로 5만 명 정도의 규모가 되었고, 그 다음에 독일로 넘어가면서 6만 내지 7만 정도의 규모가 되었고, 그 다음에 시애틀에서 99년도에 WTO반대 시위가 있었을 때, 미국에서 5만 이상이 모여 큰 사건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계속해서 IMF, WTO회의가 있는 곳으로 계속해서 번져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규모를 잃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2만에서 5만, 7만, 8만까지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1년에 두세 번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것이 갑자기 시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평화 인권 단체나 반미 단체에 가입한 회원들이 갑자기 늘어났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저도 현지에 몇 번 있어봤는데, 정말 삼삼오오 동네에서 연락해서 자동차 빌려서 오는 평소의 시위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것이 자기 돈 들여서 오고, 몇 만 명이 되고, 그것이 실제 정부가 하는 일에 타격을 주고, 그것에서 다시 자신감을 얻고, 메시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이번 반전 운동에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저희도 촛불시위와 결합되어서 상당히 크게 나타났습니다만 최대 규모를 봤을 때, 스페인 같은 경우 200만 정도가 동원되었습니다. 3월 중순 한 주에 200만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영국이 100만, 독일이 수십만, 이탈리아 같은 경우도 백여 만 명이 되었습니다. 전세계 수십 개 국가에서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전쟁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아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미국과 같은 경우도 이라크전 전후 한 1,2주일 사이에 반전 운동을 한 도시의 숫자가 무려 6,400개가 넘습니다. 미국 주마다 20여 개 이하의 시위를 한 주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대통령 선거의 분포를 보면, 동부와 서부 지역에서 민주당이 득세를 하고, 중남부 지역에서 공화당이 득세를 했습니다만, 실질적으로 경제력과 기술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동부, 서부 지역입니다. 현재 미국을 움직이는 지역에서는 부시의 일방주의를 지지하는 기운이 상당히 낮습니다. 부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60%, 70%가 되는 동안 여전히 유엔 결의안을 통과하지 않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여론 역시 60%, 70%로 높았습니다. 세금 감면 정책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반대 여론이 높습니다. 미국 역시 부시에 대한 지지가 높은 것이 밉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소외당한 사람들의 반대 여론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중남미의 반미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이 흐름을 예사롭게 볼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이유로써 규모가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어떠한 반미 운동, 반패권 운동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참여하는 구성도 완전히 다릅니다. 전문적인 운동가나 운동 단체를 훨씬 뛰어넘는 광범위한 대중 참여가 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그 속에서 단순히 전쟁 반대, 이렇게 협소한 시각에서 세계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시각이 굉장히 넓고 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반전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전에 있었던 반세계화 운동,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를 바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 의식이 중첩되는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이 우리들이 문제를 예사롭게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슬람에서의 대중적인 저항을 다르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저희와 행동을 달리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것의 핵심은 미국의 체제에 대한 대중적인 반발입니다. 더 이상 동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가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취약점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제외하고 미국 체제를 지지했던 동의의 기반은 무엇이었을까요? 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이 세계를 설득하는 초점이 무엇이었을까요? 경제 개발과 자유였습니다. 시장 경제를 도입하면 잘 살게 될 것이다, 민주제도를 도입하면 자유를 갖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편, 자유진영에 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이 세계를 설득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시장에서의 자유, 그리고 시민권으로서의 자유. 이것은 로마 제국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도 열심히 노력하면 미국식의 민영화된 가치와 질서를 가지게 되면 언젠가는 미국식 시민권을 우리가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계화에 대한 비판과 이번 반전 투쟁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시장에서의 자유, 그리고 미국 시민들이 가지고 누리는 자유가 나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서는 너희들의 제도가 불가능하다는 자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후 미국 체제를 지탱하는 두 가지의 기둥이 광범위한 대중 속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너짐이 비웃음으로 나타나고 있고, 반미구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조기를 불태우는 미국 전체에 대한 미움으로, 민족적 반미 정서로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두 개의 기둥이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에 자칭 매파, 네오콘들의 과격한 외교적 안보 노선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평화에 관련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미국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평화 운동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안보론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하는 것이 평화운동의 발전에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첫 번째 시간인 만큼 한반도 북핵 문제라든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도입부로서 이런 전쟁문제나 안보 위기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문제, 그리고 그것에 대항해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문제에서 우리가 어떤 지점을 짚고 넘어가야 하고, 의문시하고, 허구성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도입부다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쟁과 평화에서 전쟁을 억누른 상태를 평화라고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평화는 우리의 토속어가 아닌 듯 합니다. 평화라기보다는 태평성대라든가 하는 저희가 생각하는 고전적인 질서로서 생각되어져 왔습니다. 평화라는 말 자체를 쓴 것은 서구를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서구의 정치언어를 우리가 번역을 해 나가면서 생긴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19세기말에 사전적으로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처음 번역을 하게 됩니다. 한자에서 평화라고 따와서 그 때부터 평화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중국 사람들은 ‘화평’이라고 번역을 해서 썼습니다. 이것이 서구의 peace 혹은 pax의 번역어 인데,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사전적으로 번역하다보니까 국제 정치에서 서구가 막강해 보이고, 그것이 마치 근대 질서인 것처럼 그런 이미지 속에서 번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충분한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서구에서 이야기하는 pax, peace라는 것은 사실은 저희가 추구하는 그런 가치, 편안하고, 안전한 그런 이전에 질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질서와 장악.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에서 먼저 쓰기 시작한 평화라는 말은 로마인들이 가서 성을 쌓고, 정착지를 꾸리고, 로마 국가를 부르고, 로마 칼을 들고, 로마 방패를 들 때 pax가 생기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pax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정치적인 용어로 평화라고 쓰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기독교에서 계속해서 종교적인 언어로 사용하면서 영적인, 정신적인 영역이 가미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언어로서의 평화는 사실 어원으로 따지자면 대단히 문제가 많습니다. 저희가 쓰는 많은 언어가 서구를 만나서 서구를 모델로 해서 쓰는 말들이 많습니다. 안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저희의 일상적인 근대정치를 설명하는 언어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미에 패권과 반패권 문제와 연관지어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안보라는 말도 한 번 비판적으로 따져보고 싶습니다. 안보라는 말도 번역어입니다. 근대 이전에 중국 자료나 기타 자료를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안전을 보장한다는 뜻을 줄인 말인데, 역시 일본 사람들이 19세기말에 국제 회의 자료를 번역하면서 안전 보장이라는 말을 줄여서 나중에 안보라고 썼습니다. 이 안전 보장에서 안전이라는 말과 보장이라는 말을 어디서 따왔느냐고 하면 영어의 security에서 왔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할 때는 속임수입니다. 이유는 서구에서 근대 국가나 나타나기 전에 봉건 시대 영주들이 서로 경쟁을 하고 자질구레한 전쟁들을 하던 시기에는 안보라는 말, security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 외에 secure한다는 것은 자신이 확실히 가지고 있다, 즉 재산권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근대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노동 계급의 반발, 프랑스 혁명의 반란에 직면하면서 재산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국가의 제1과제, 임무는 재산권을 안전하게 하는 것, secure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국가의 과제 중의 하나를 security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절대국가로 넘어가면서 국가의 권력, 국민 국가라는 개념 형성이 되면서 국가는 외국으로부터 국내의 재산권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보호하는 그러한 신성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존재 목적이다라고 해서 안보를 국가의 존재이유로 설명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안보라는 것은 지배 계급이 지위를 빼앗길까봐 걱정하는 것을 국가가 확실히 보장해 주도록 요청하는 것에서 나왔습니다. 국가는 당연히 생존해야지라고 하는 당연의 전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 재산, 또는 권력을 그 국가 안에 있는 혹은 국가 바깥에 있는 세력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안보라는 것도 결국 국가가 누군가를 지켜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는 세력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정당한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안 지켜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보의 어원도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

평화론에서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는 소극적인 평화이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끔 아예 구조를 바꾸는 것은 적극적인 평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평화론과 안보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론의 핵심으로서의 안보론에 대해서 말하자면, 아직도 국가 안보라고 하면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보안법의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고, 안기부나 중앙정보부가 자기 머릿속에 도청장치를 심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피해 망상적인 환자들이 70, 80년대 계속해서 생겨났습니다. 그런 국가 안보 체제를 우리는 거쳐왔습니다. 70, 80년대에 반전운동 시위를 했을 때, 그것은 안보의 위협이 된다, 사회 불안을 조장하고, 국가 안보를 저해하는 불순 세력들이라 하여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고 했을 때 그것이 가져온 정치적인 효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공포였습니다. 국가 안보의 핵심은 공포를 동원하는 정치적인 언어입니다. 그 공포가 동원이 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것을 해치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진다, 죽음과 삶의 선택으로 국민들을 몰아넣는 것이 안보의 정치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하면 북한이 쳐들어온다. 다 같이 죽을래 말래? 이렇게 됩니다. 여기에 숨어 있는 것은 우리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저쪽에서 쳐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향상적인 통일성을 만드는 것입니다. 향상된 단일성을 만들어 내고, 그 바깥에 있는 모종의 세력에 대해서 우리의 존폐를 위협하는 적에 대한 규정이 필요합니다. 적에 대한 규정과 향상된 단일성으로서이 우리는 대칭관계에 있습니다. 의회에서 토론하고 시민 사회에서 토론하고 100분 토론회하고 100인 토론회 해야만 하는데 논쟁 안 합니다. 왜 입니까?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국가 권력을 위임했으니까 나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민주 정치에 대한 우회가 발달합니다. 왜 이런 예외가 가능할까요? 바로 공포를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안보 정치의 핵심, 국가 안보의 허구는 공포를 동원함으로써 정상적인 정치를 우회해서 예외적으로 일을 처리해도 괜찮다는 기득권 세력의 예외적인 정치의 정당성 확보 전략입니다. 70, 80년대 국가 안보 체제를 거쳐 나온 분들에게 이런 말은 국가 보안법은 정권 보안법이라는 말이라는 것과 일맥 상통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한국에만 적용되는 것일까요? 최근에 부시가 대테러 전쟁을 할 때 쓰는 언술을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이라크에 있지도 않은 대량 살상무기가 미국의 이익에 근본적인 위협이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북한의 핵위기는 미국의 위기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 동참해서 같이 싸우면 우리편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이 됩니다. 안보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공포를 동원하고 미국이 바로 공격을 받는 것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부시는 전형적인 안보 정치의 재판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국제 정치의 핵심이 안보정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국제학 공부한 사람들이 쓴 글을 보면 대부분이 전쟁과 평화에 관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안보라는 표현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전쟁을 회피할 것인가, 또는 전쟁이 안 나도록 더 강한 군사력을 가질 것인가, 이런 상태를 어떻게 하면 평화 체제로 구명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국제 정치를 하는 전문가들 또는 실제 행위자들의 핵심이 안보정치와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의 핵심은 해석입니다. 위협을 해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남북한을 비교할 때 북한의 탱크가 4만대 있고, 남한의 탱크가 2만대 있고, 북한에 전투기가 1800대가 있고, 남한에 전투기가 700대가 있어서 북한의 군사력이 우월하므로(수치는 정확하지 않음.) 북한의 공격력이 남한보다 우월하다, 이런 것이 전형적인 군사전문가들의 어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박은 주로 북한의 탱크는 낡았고, 뭐 이런 것입니다. 여기서 빠진 것은 탱크와 전투기가 그 자체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탱크와 전투기는 물건이고 그것을 쓰는 것은 사람입니다. 일본에도 탱크 있고, 최첨단 무기가 있고, 중국에도 핵무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위협이 되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 이 세력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무기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하고, 그 의지를 상대방이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위협이 됩니다. 군사전문가, 안보전문가들이 독점하고 있는 이 위협의 해석은 약 10% 내지 20%의 사실과 나머지 80% 내지 90%의 해석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러한 논쟁에 있어서 일반인들, 비전문가들은 개입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안보 위협에 대한 해석은 밀실에서 이루어집니다. 국가안전보장위원회에 일반 해석은 전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안기부에서 내리는 북한 위협의 해석, CIA에서 내리는 북한 위협의 해석에도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안보 정치의 핵심은 공포를 동원하는 것이고, 공포를 동원하는 것은 위협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위협을 해석하는 것은 약간의 사실과 대부분의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그 주관적인 해석은 국가 안보기관이 독점함으로써 공포 정치가 가능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시민사회를 성숙하게 하려는 세력으로서, 평화운동을 하려는 세력으로서, 반민주적이고 독점적인 결정권에 도전하려는 세력으로서 관심을 두어야할 부분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 공포를 동원하는 정치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두 번째 공포의 근거로서 적과 우리라는 경계의 형성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우리란 누구이며 우리와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결국엔 공포의 문제, 국가의 생존에 대한 단순한 접근의 문제, 우리의 정체성, 그들의 정체성, 우리와 그들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의 문제로 돌아오게 됩니다. 안보의 정치를 해부하게 되면, 그리고 안보가 국가권력의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결국 적극적인 평화론, 폭력과 전쟁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평화론의 경우 안보론의 해체를 중심적인 실천과제로 가져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체성의 문제, 적의 문제, 관계의 문제, 공포의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요약을 하겠습니다. 현 시기의 평화 운동을 우리가 어떻게 고민할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아름다운 일로만 생각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바람직한 일입니다. 또 항상 그렇게 진행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우리 사회, 점점 세계화를 이루고 있는 이 지구촌 체제에서 보면 가장 극심한 폭력을 역시 군가의 군사력, 전쟁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쟁이 취약해지고 있는, 흔들리고 있는, 절박해지고 있는 패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절대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미국에 의해서 크게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가 미국 문제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미국에 크게 좌우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미국 패권체제를 외면한 평화 운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평화 문제는 바로 이 패권 체제에서 출발을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이 절박한 미국 패권 체제가 유지되는 방법은 바로 안보정치를 동원하고 사람들에게 공포감, 우린 문명, 너희 야만 따라서 우린 너희를 죽일 수 있어, 라는 구분법이 가능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안보정치의 해체를 우리가 바로 핵심에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쪽에서 반세계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의 평화운동, 국제적인 구성을 바로잡기 위한 평화운동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강대국이라는 것이 미국이 되엇든, 영국이 되었든, 프랑스가 되었든, 러시아가 되었든, 심지어 중국이 되었든 누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패권적 정치, 안보적 정치를 근본적으로 탈피하는 흐름으로서의 평화운동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이런 흐름과 같이하는 평화 운동을 본다면 궁극적으로 이러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습니다. 저희의 안보정치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로 등장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가서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그 바탕이 되고 있는 한미동맹이라는 것의 속뜻은 무엇인가? 일방적으로 우리가 끌려가는 것인가?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체성, 우리는 누구여야 하는가? 대한민국이 아닌 이들의 정체성, 다른 국가 다른 세력의 정체성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생각을 할 수가 있는가? 통일 운동 따위에서 나타나는 민족의 관심이 다른 관심사보다 우선하고 있다는 것이 북한에 대한 생각, 대한민국의 앞으로의 비전, 또는 노무현 정부가 거의 말로만 하고 끝날 공산이 큰 동북아 중심국가론으로서의 비전과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와 일본, 우리와 중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어떤 우리로 규정할 것인가가 운동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나라의 평화운동과 결합하는 방법도 한반도에서 위대한 한민족으로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짓밟고 있는 외세, 미국에 대한 저항, 이런 면도 없진 않겠지만, 그런 면보다는 기존의 반세기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미 세계체제 속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을 뛰어넘는 더 훌륭한 더 인간적인 개인과 집단, 국경을 넘어서 통할 수 있는 인간 집단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비전을 열 수 있는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만을 가지고서 미국이 이야기하는 적극적인 평화론, 안보론을 해체하는 평화운동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이런 것들은 우리의 고유한 평화운동론을 정립하는데 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다음에 평화운동의 다양한 유형, 방법에 관해서는 토론 시간에 계속 하기로 하겠습니다.


[참석자1] 미국에 대한 일련의 테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연자] 저는 심약해서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동의하기도 참 힘듭니다. 그 분들을 반대하고 그 분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것으로 미국의 거대한 체제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효과적인 수단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참석자2] 우리나라 역시 과거 역사에서 윤봉길 열사라든지 안중근 의사와 같은 여러분들이 계신데, 그 분들 역시 테러리스트였고, 일본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께서는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민족적인 감정이 많이 투영되어서 그런 테러리즘이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9.11 테러에 대해 저는 개인적으로 엄청 통쾌했습니다. (다들 웃음) 내 가족들이 직접 피해를 보았다면 말이 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서 평온한 현재에서 이러다 저렇다 말하는 것이 어폐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민감한 문제지만 좀더 이성화 되고, 의식이 성장하면서 충분히 생각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영원히 반복되는 테마일 수도 있구요.

[참석자3] 그 점에 관해서 미국의 반전 세력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미국에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큰 반전 평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테러의 원인이 미국 자신이지 빈 라덴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이성으로 가는 중요한 변모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은 징병제라 대학생들도 많이 참전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미군들이 미국의 매카시즘을 피해 북한으로도 많이 넘어갔다고 합니다. 우수한 두뇌들이 100명이 넘게 평양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북한 정권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참석자4] 너무 위험한 발언이 아니십니까? (다들 웃음)

[참석자3] 내가 이런 이야기를 다른 데서는 안 합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이라는 실체는 허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라크 파병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부대 이동에 불과합니다. (다들 웃음) 파병이랍시고 시위를 하고 비준을 하고 하는 것도 어쩌면 허구의 한 단면일 수 있습니다. 저는 시위에 참석해서 현재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의 의식 수준이 언 정도인지 분석도 많이 하고 하는 편입니다.

[강연자] 혹시 오늘도 분석을 하러 오셨습니까? (다들 웃음)

[참석자3] 우리는 많은 부분 미국에 의해 세뇌되어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어떤 계획을 세울 때 이 곳 우리나라에서 테스트를 먼저 해 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기득권 세력이 거기에 영합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볼 때는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북쪽에 희망이 있다고나 할까. (다들 웃음) 이런 사실은 미국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앞으로 미국와 북한이 우방국이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 그런가를 설명하자면 밤이 새겠지만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니 그만 하겠습니다.

[참석자4] 강의를 하나 더 늘려서 강의를 하시는 게 어떤지? (다들 웃음)

[참석자3] 미국와 북한이 우리 우방이 된다는 것은 천기누설이니 선물이라 생각하십시오. (다들 웃음)

[참석자5] 북핵 문제와 미국의 MD정책에 대한 개인적인 소견은 어떠십니까? 북한이 미국와 담합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강연자] 개인적인 추측을 물으시는 것 같은데, 저는 북한 내부 사정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미국에서 어떠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추측할 뿐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추측할 뿐인데, 정보를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이러쿵저러쿵하는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럴 것이다, 혹은 저럴 것이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한쪽 편을 드는 식으로 논쟁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설정해놓은 논쟁 구도에 그대로 딸려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보다는 좀더 효과적인 접근을 해 보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이것이 과연 위기인가 아닌가? 우리는 위기가 아니라고 보겠다는 해석의 독점에 대한 도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추측의 게임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질문자의 말씀에 많은 부분 동의를 합니다. 냉전 체제 하에서 양국 진영의 고위 관료들이 자발적으로 이중첩자 노릇을 해 왔던 것이 사실이고, 북한과 미국 역시 고위층에서 상당수가 이중첩자 노릇을 하면서 서로를 위해 협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추측입니다. (다들 웃음)

[참석자5] 이라크 전쟁 이후로 많은 평화 강좌가 있었지만, 이제야 약간은 해답이 좀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다들 명쾌한 해답은 내리지 못하고,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너무나 단순한 논리를 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참석자6] 테러리즘에 대한 이야기나 방금 하신 말씀이나 결국은 어떻게 평화를 획득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강의하신 내용 중에 안보론의 효과 부분에 대한 부연 설명과 평화운동의 유형 중 여성주의적 반군사주의와 생태 평화주의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해 주십시오.

[강연자] 저는 여성주의자라고 자처할 만큼은 못되지만 평화운동이나 안보론 비판에서 여성주의만큼 효과적이고 타당한 접근 방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테러리즘에 대한 개인적인 유보 중의 하나는 어차피 인간의 실천이라는 것이 여러 파급효과를 가지는 것이라면 현재까지의 민간 테러리스트의 모습을 보면 결연한 남성적 행위가 재생산하는 엄숙주의, 영웅주의적 이미지가 운동의 확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전 평화운동에도 영웅적 이미지를 해체하고 영웅이 아닌 개미떼들을 할 수 있는 운동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국제 정치를 포함한 정치의 영역은 언제나 남성들의 영역이었습니다. 외교관들이나 국제정치인들의 이미지가 남성적일뿐더러 그들의 언어도 ‘자존심 싸움’, ‘패권’, ‘세력’, ‘동맹’, ‘동지애’ 등 남성적입니다. 국제정치에 대한 핵심적인 비판이 남성의 이미지를 반영한 특수한 정치형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탈국제정치, 탈안보의 평화 실천의 출발은 현실 생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현실 생활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관해서 접근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회운동보다는 생활현장운동이나 여성운동이 훨씬 감수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평화운동 단체들만이 시위를 하는 모습보다 미국 패권체제에 도전하는 다양한 일상사의 아이디어를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상당수 해외 여행자들이 달러를 사용합니다.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합니다. 그런데 달러를 유로화로 바꾸는 것이 크게 문제되는 것이 없습니다. 일부 국가의 평화운동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데모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달러를 유로로 바꾸는 것을 운동으로서 상징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치 간디가 영구 식민지를 거부하면서 바닷물을 떠서 소금을 만들었듯이 바로 생활 현장에서 거부하는 것이 생겨나길 바랍니다. 또 하나 이주 노동자들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의 40만에 가까운 이주 노동자들 중 20여만 명이 작전활동을 했습니다. 이들 중 비자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도 비자를 받지 않으면 됩니다. 이주 노동자 문제를 비자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을 해 주는 겁니다. 비자에 대한 고정관념, 국경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겁니다. 일상사에 있는 사람들이 미국 패권에 대해서 도전하고 있고, 거부하고 있다는 상징을 만들어내는 운동 감각이 필요합니다. 여성주의적 반군사주의의 경우 아시겠지만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미국 언론에서 쿠웨이트에 대한 강간이라고 표현한다든지, 미국 언론에서 나온 사진들을 보면 장갑차 뒤에 반라의 여자의 사진들을 붙여놓고 장갑차로 전투하는 행위들이 사진에 잡혔습니다. 폭탄에도 그런 그림이 그려져 있고, 재작년 파주 미군기지에서 미군 병사들 동호회 하면서 티셔츠를 만들었는데, 한국 여자가 나체로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고, 위에 미국의 전투기들과 미사일들이 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가 ‘아무리 많이 와도 환영이다’라고 쓰인 구호가 적힌 티셔츠가 팔립니다. 군사주의를 지탱하는 것 중에 남자가 여자를 지킨다, 국가가 국민을 지킨다는 남성 여성의 대비법이 처음부터 투영되고 있습니다. 안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에 대해서 가부장으로서의 국가가 집안을 지키는 어머니로서의 국민, 딸들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국제정치, 안보, 전쟁에 쓰이는 모든 언어와 이미지가 이런 가부장적인 이미지를 모사해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람들을 설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자들을 동원하기 좋기 때문입니다. 이 고리를 깨는 것이 중요하고, 이 고리를 깨지 못하고 전쟁과 군사력에 반대하기는 힘이 듭니다. 군대의 본성, 국가의 본성 대해서 접근해 들어가는 방법은 제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여성주의 고민하시는 분들이 제일 많았고 많이 기여를 해 주셨습니다. 다른 나라 평화운동에 비해서 우리나라 평화운동이 아직은 그런 감수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2010/10/23 21:44 2010/10/23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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