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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21:48, 하자평화연구_Field

폭력에 대한 실천적 비판

 

이 글은 [디오니소스의 노동] 제2권(갈무리, 1997)의 7장의 일부이다. ■ 조정환

 

 

그래서 우리는 현대의 정치적 지평을 분석하는 데에 유익한 이론적 수단들이 극히 풍부하며 다양하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치적 실천을 위한 가능성들의 현대적 지평은 결코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한 것은, 시민사회의 사멸과 더불어, 집단적 저항의 전통적 채널들이 더 이상, 이전에 그것들이 기능했던 것처럼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 모두는 대규모 공장생산의 위기 및 분산과 더불어, 산업적 노동조합 운동이 불과 25년 전에 가졌던 막대한 권력 가운데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현상을, 학교나 교회와 같은 시민사회의 다른 제도들과 관련하여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다양한 각도에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훈육적 시민사회의 제도들의 평면화는 그와 더불어 저항의 제도적 형식들의 동등한 수준의 평면화를 가져왔다. 통제사회들의 부드러운 공간들로의 이행은 전통적인 대립의 제도들을 제거했고 그것들을 그것[통제사회들의 부드러운 공간-역자]의 얼음 같은 표면들 위에서 비틀거리며 미끄러지도록 만들었다. 집단적인 사회적 실천에 대한 전통적 개념규정은 이 새로운 맥락 속에서 재고되어야만 한다.

 

실천적 차원에서, 우리가 전투성의 현대적 형식들에 주의를 돌리면, 전통적 제도들이 사라짐에 따라 가능한 정치적 실천의 지평이 움츠러들어, 이제 마치 비폭력과 테러리즘이라는 오직 두 가지의 극들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개의 선택들 사이에서 괴롭힘을 당하면서, 그리고 테러리즘의 자살적․반(反)생산적 성격을 인식하는 가운데, 투사들은 어쩔 수 없이 비폭력적 길을 선택한다. 예컨대 걸프전 동안에, 미국의 행동주의적 좌익은 비폭력적 행동의 담론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담론은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사상에 느슨하게 근거하고 있었으며 1960년대의 인종차별 반대운동, 베트남과 중미에서의 반전 항의, 그리고 반핵운동 등의 경험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비폭력적 담론에서 태어난 행동들은 일반적으로, 항의자들이 공적 질서의 상징적 과정을 혼란시키는 동안(예컨대 군사 징병 센터, 연방 관청 빌딩, 혹은 핵실험 부지 등에 대한 방해적 접근), 항의자들의 희생ꠏꠏꠏ흔히 체포되고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경찰에 의해 얻어맞는 따위의ꠏꠏꠏ을 보여주는 미디어 폭로를 목표로 하는 항의의 형식을 수반한다. 그러한 혼란들은, 그것들이 주로 직접적 효과들을 지향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의 재현들의 간접적 효과를 겨냥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실제로 이윤을 감소시킴으로써,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국민경제를 위험에 빠뜨림으로써 회사와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경제적․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노동파업과는 달리, 이 비폭력적 행동들은 특정의 주장에 대한 공적 지지나 혹은 더 흔히는 정부의 행동들 또는 정책들에 대한 공적 비난을 간접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에 의해 작용한다: 그것들은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자 애쓴다. (그래서 비폭력적 행동들은 미디어 폭로를 박탈당하면 대부분 완전히 무용하다.)

 

비폭력적 행동에 관한 이러한 담론은, 시민사회의 붕괴 이후에, 사회적 실천의 문제들과 밀접히 연관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권능의 문제와 폭력의 문제. 비폭력적 행동의 관점에 의해 촉진된 권능의 관념은 매우 애매하다. 그것[비폭력적 행동의 관점-역자]이 기초해 있는, 폭력의 거부는 그냥의 권능의 거부와 너무나 쉽게 혼동된다. 사실상, 비폭력적 행동들은 주로, 권능없는 사람들과의 공감 속에서 격노의 도덕적 반작용을 이끌어 내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얻으며 그래서 그들의 희생의 미디어적 재현에 초점을 맞춘다. 비폭력적 항의자들ꠏꠏꠏ그들은 일반적으로 희생자들 자신이 아니다ꠏꠏꠏ은, 권능없는 사람들의 부당한 곤경을 재현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를 희생당하는 위치에 둔다. 경찰에 의해 운반되어지고 있는 항의자들의 축늘어진 몸의 미디어 이미지는 가해하기(예컨대 엘 살바도르 혹은 바그다드 폭격)라는 또 다른 행동을 재현하는 한 편의 드라마이기를 의도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행동들은 권능없는 사람들의 재현이라는 도덕적 권능을 이용하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폭력적 행동은 테러리즘의 거울 이미지이다. 테러리즘 역시 상징적 제스츄어에 의해 작용한다; 그것 역시 미디어 재현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지향하지만 테러리스트의 행동은 이와는 반대로 그 자신의 권능과 자신의 적인 국가의 무력함을 재현하고자 한다. 재현적 지평은 비폭력적 행동과 테러리즘을 반대의 극에 함께 지니고 있다.

 

비폭력적 행동의 담론에 의해 제기된 두 번째 문제ꠏꠏꠏ그것은 첫 번째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ꠏꠏꠏ는 그것이 자신의 기반으로 가정하는 폭력 비판과 정의(正義)의 명제이다. 이 전통ꠏꠏꠏ그것은 간디, 토마스 머턴(Thomas Merton), 그리고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사람들의 사상 속에 들어 있는 명백한 종교적 구성요소를 포함한다ꠏꠏꠏ속에는 분명히 폭력적인 것의 내재적 부정의(不正義)와 그에 상응해서 비폭력적인 것의 정의(正義)를 가정하는 하나의 강력한 특질이 존재한다. 이 도덕적 관점은, 그들이 공정한(just) 입장을 만족스럽게 대표한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비폭력적 행동주의자들의 순수성에 집중해야만 한다. 예컨대 간디는, 우리가 비폭력을 채택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치적으로 효과적이기 (그리고 그것이 비효율적으로 보여질 경우에는 폐기되어도 좋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옳고 또 모든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굽힘없이 주장한다. 폭력으로부터의 이 순수성의 태도는 (가끔은 종교적 요소 없이) 미국의 다양한 행동주의적 커뮤니티들 속에 널리 퍼져 있다. 그리고 이 태도는 음식물, 영화감상, 성적(性的) 관계 등등과 같은 다양한 활동들에서 정치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것과 긴밀하게 서로 연계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형태의 폭력은 본래부터 부정의하며, 항의자들을 그들이 반대하려 하고 있는 국가의 행동들과 동일한 도덕적 범주 속에 던져 버릴 것이다.

 

이론적 차원에서, [우리가 전투성의 현대적 형식들을 고찰하면-역자]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폭력 외부에 있는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폭력을 비판하려는 시도들이 아무래도 위험하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우리는, 쉽게 분리할 수 없고 오히려 우리들의 세계 전체와 우리들 자신을 부어넣는 폭력의 형식들을 탐구한 여러 저자들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인종에 관한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과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의 연구, 계급에 관한 마르크스의 연구, 빈곤에 관한 이반 일리치의 연구, 섹슈얼리티(sexuality)에 관한 캐터린 맥키논(Catharine Mackinnon)의 연구 등등. 우리들 자신이 폭력으로부터 순수하다고 간주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폭력을 구성하는가에 대해 매우 축소된 관념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폭력에의-역자] 연루는 우리들의 사회적 실존의 조건이다. 게다가 폭력과 부정의(不正義) 사이의 도덕적 등가성을 승인하는 것은 매우 지탱하기 어렵다. 유물론적 전통은 오랫동안, 세계의 본질인 권능의 행사를 폭력의 한 형태로 이해해 왔다. 스피노자와 니체와 같은 저자들에게서 삶 그 자체는 폭력을 포함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권능의 행사라는 맥락 외부에서 권리, 공정, 혹은 선에 대한 일체의 개념을 제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렇게 해서 초래될 수 있는 것이라곤, 삶을 부정하고 더욱 특별하게는 우리들의 권능을 부정하는 일종의 도덕성 혹은 금욕주의일 뿐이다. 이러한 종류의 재현적 정치에 포함된 간접화된 분노는 바로, 자신이 결단코 반대하고자 한 것과 비폭력을 함께 주조하면서, 비폭력을 테러리즘과 연결짓는 것이다. (그래서 테러리즘에 대한 비폭력적 비판은 취약한데, 그 이유는 그냥의 폭력에 반대하고자 하는 시도 속에서 그것이 테러리즘적 폭력의 특수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수행적 실천들과 그것들의 목적들 사이의 외면적 연관을 제기하면서, 근본적으로 재현적 정치의 지평 위에서 테러리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이 이론적 맥락 속에서 지탱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적 행동이 왜 최근에 행동주의적 그룹들 사이에 그토록 널리 확산되었는지는 이해 가능하게 되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시민사회의 사멸로부터 초래된 정치적 행동의 합법화된 형식들의 부족을 나타낸다. 시민사회의 제도들은 합법적인 정치적 쟁의의 채널들을 제공했고 다양한 형식의 정치적 폭력을 합법화했다. 가장 뚜렷한 사례는 제도적 노동조합들에게 승인된 파업의 권리이다. 와그너 법령(Wagner Act)과 국민 산업 회복 법령(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에 의해 미국에서 성문화된 조직의 권리와 파업의 권리를 가지고서 노동조합은, 폭력을 사용하도록 법률적으로 인가된 국가 바깥의 가장 큰 제도가 되었다. 시민사회의 모든 제도들을 통해 흘러가는 정치적 쟁의의 형식들은 이러저러한 몇몇 형식들 속에서 폭력의 합법화를 포함했다. 그렇지만 시민사회의 사멸과 더불어, 폭력적인 정치적 쟁의를 합법화했던 구조들 역시 똑같이 사멸했고 그리하여 이제 어떠한 쟁의적 폭력도 합법화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쟁의적 실천의 지평은, 한편에서는 비폭력적 행동,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테러리즘이라는 두 개의 극단들 사이에서 무력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두 개의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들 사이에서 우리가 설자리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더 풍부한 가능성들을 가진 다른 지평으로 이동할 수 있기 위해서 정치적 실천과 폭력의 조건들은 분명히 재고되어야 한다. 폭력에 대한 비판은 처음부터 삶이나 우리의 세계 속에서 폭력의 경계들을 설정하는 작업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은 폭력 내부의, 그리고 권능의 행사 내부의 구별들을 내면적 관점에서 분간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푸꼬는 권력(power)에 대한 자신의 비판에서, 자신이 권력 관계들이 없는 사회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처음부터 모든 형태의 권력을 의문에 부치는 분석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나는 모든 형태의 권력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권력도 반드시 수용가능하거나 반드시 수용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나키즘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요즈음은 수용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아나케올로지(anarcheology)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권력도 반드시 수용가능한 것으로는 여기지 않는 방법이다” (“Du Gouvernement des Vivants”). 푸꼬의 아나케올로지를 방법론적 기초로 사용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폭력도 반드시 수용가능하거나 혹은 반드시 수용불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우리 삶 속에서 여러 형태들 및 심급들의 폭력들을 구별하기 위해 그것들에 주목하는 그러한 폭력 비판을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폭력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출발시키는 정신이다. 벤야민의 구별 기준은 폭력과 법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폭력의 우세한 형태는 다음의 두 가지 기능들 중의 하나에 복무하면서 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법형성적 기능 혹은 법수호적 기능. 국가의 다양한 기구들(경찰, 군대, 사법부 등등)은 모두 이 기능들 중의 한 가지 혹은 둘 다에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국가에 대립하거나 혹은 국가의 목적들과는 상이한 목적들을 달성하고자 하는 많은 폭력 형태들 역시 그러하다. 폭력의 이러한 형태들 역시 법을 제기하려 애쓴다. 비록 그것이 현재의 법을 파괴하는 새로운 법일지라도 말이다. “수단으로서의 모든 폭력은 법형성적이거나 법수호적이다. 만약 그것이 이 속성들 중의 어느 것에 대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체의 유효성을 상실한다”(“Critique of Violence”, p.287). 이러한 폭력 형태를 합법화하는 논리는 수단들을 목적들에 연관시키고 원인들을 결과들에 연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벤야민은 여기에서 모든 형식의 인과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게 외면적인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ꠏꠏꠏ즉 원인에 외면적인 결과, 수단에 외면적인 목적을. 이러한 유형의 폭력은 행동(폭력)과 그것의 재현(법) 사이의 외면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벤야민은 이 법형성적이고 법수호적인 폭력에ꠏꠏꠏ재현들의 지배적 효과를 포착하는 신화라는 개념을 사용하여ꠏꠏꠏ신화적 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법을 제기하고 지탱하는 폭력들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 벤야민에게 분명히 떠오른다. 우리는 자신의 목적에 외면적인 수단들이 아닌 폭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비재현적인 혹은 재현불가능한 폭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벤야민은 국가를 통제하려 하는 혁명적 운동의 개념과, 국가권력 일체를 파괴하려 하며 법과의 어떠한 연관도 거부하는 운동의 개념 사이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에서 시작한다(pp.291~292). 폭력의 이 두 번째 형태 즉 혁명적 폭력은, 그것이 자신의 효과를 위해 자기 자신에 외면적인 어떤 것도, 어떠한 재현들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순수하고” “직접적”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나키즘을 하나의 대안적 폭력 형태로 제안하는 것은 부정적 정의(定義)를 제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벤야민은 폭력의 이 두 번째 형태를 신성한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긍정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신화적 폭력은 그 자신을 위해 단순한 삶 위에 군림하는 유혈적 권능인 반면, 신성한 폭력은 살아 있는 것을 위해 모든 삶을 다스리는 순수한 권능이다”(p.297). 신화적 폭력은 법을 이행하며 단순한 삶에 대한 법의 지배를 재현한다; 신성한 폭력은 비매개적 방식으로, 법 외부에서, 살아 있는 것의 형식 속에서 삶 그 자체를 표현한다. “우리는, 우리가 통치하는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체의 신화적 폭력, 법형성적 폭력을 거부해야만 한다. 우리는 또 법수호적 폭력, 즉 통치에 복무하는 통치되는 폭력을 거부해야만 한다. 신성한 폭력은 ······ 신성한 집행의 서명날인이지만 그 집행의 수단은 결코 아니다”(p.300). 우리는 이 신성한 폭력을 제헌적 권능이라고 부른다.

 

대중의 구성적 실천은 그 자신의 권능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다. 이 실천은 수행이 아니다; 그것은 효과를 겨냥한 자신의 재현들을 기대하지 않으며,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 데에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하지도 않는다. 이 대안적 실천은 재현의 실천과는 완전히 다른 지평 위에서 작용한다. (이처럼 구성적 실천은 우리에게 테러리즘의 수행에 대한, 그리고 재현적 정치의 전체 지평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적절한 비판을 제공한다.) 들뢰즈는, 이 구성적 실천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그것에 내재적인 권능을 제기한다고 말하곤 한다; 수단과 목적이 유효적 인과성의 내적 관계 속에서 제기된다. 제헌적 실천이 따르는 유일한 논리는 대중의 권능의 확장적 리듬이다. 이 실천은, 바로 그것의 야성적 행동이 존재를 파괴하고 구성한다는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신성하다. 쟈끄 데리다는, 벤야민의 “신성한 폭력”에 대한 해석에서, 그것을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완전 타자” 등의 순전히 신비화된 용어들로 제시하면서, 인간으로부터 신성한 것을 떼어내려고 애쓴다. (“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 pp.55, 57). 하지만, 벤야민이 말하는 신성한 것을 인간의 영역(sphere)에 침투해 들어오는 하나의 영역으로 읽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다른 상황 속에서, 만약 우리가, 신성한 폭력이 (신화적 폭력의 그리스적 특징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우선적으로는 유대교적 관념으로 읽혀져야만 한다는 데리다의 흥미로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ꠏꠏꠏ데리다가 선호하는 것으로 보이는ꠏꠏꠏ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의 유대교와 보조를 맞추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이단적인 유대교와 보조를 맞추어서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재현불가능하며 그 자신의 권능을 긍정한다. 구성적 실천은, 우리가 앞서 코뮤니즘의 전제들 속에서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던 바로 그것이다. 국가 질서의 속박으로부터의 대중의 탈출은 하나의 재현불가능한 커뮤니티의 행군이다. 사회적 노동자의 생산적 협력은 그것의 기술적-과학적, 비물질적, 그리고 정서적 노동을 통해 제헌적 권능을 활성화시키는 자기증식의 네트워크를 창출한다. (우리는 제헌적 주체의 계보학에 따라 이 주제를 발전시키는 것에로 되돌아갈 것이다.)

 

2010/10/23 21:48 2010/10/23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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