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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6 19:11, 기억력강화_Scrap
여성학자 나임윤경 씨의 글 중 일부.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오빠"라는 호칭 자체를 꺼려한다.
가끔 장난삼아 "오빠라고 불러" 했다가 호되게 욕을 먹고는 한다. "형이라고 불러"는 은근 반응이 좋다.
그러나 그 꺼리던 이들도 가끔 무언가를 부탁할때나 '애교' 같은 것을 부릴 때 오빠라는 표현을 쓰는데, 매우 징후적이다.
여성성에 대한 강조가 '오빠'에 담겨있음을.
그리고 그 꺼림과 특수한 사용 속에서 이 호칭에 담긴 젠더적 재생산과 권력관계를 짐작했는데,
막상 내가 설명하려니 좀 막연해서 찾아보았다.

얼마전에 책읽기를 통해서 알게된 한 여성이 나에게 편하게 "형"이라고 하겠다고 해서
"오빠"는 역시 좀 이상하죠? 그래도 "형"도 너무 고전적인데 하니... 결론은 호형을 허하는 것으로.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일상의 권력작동방식을 추적하는 것은 개별적인 조건에 따라 상이할 수 있다.
누군가의 연구를 통해서 확인할 것은 그 결론이 아닌 접근 방식일 것이다.


****


‘오빠’,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1) ‘오빠’는 나와 평등할 수 있을까?

   ‘오빠’가 남녀공학대학교 안에서만 쓰이는 호칭은 물론 아니지만, 그것이 남녀공학대학교에서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단어가 됨으로써 그곳 특유의 낭만성으로 포장된 후 ‘오빠’는 이제 회의가 불가능할 만큼 여자들이 한 살(혹은 한 달)이라도 먼저 태어난 남자를 부르기에 가장 좋은 단어가 되었다. 이제 여성들이 ‘오빠’ 이외의 그 어떤 호칭도 상상할 수 없게 되었을 만큼 ‘오빠’는 여성이 남자선배를 부르는 유일한 단어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오빠’가 여성들 모두에게 처음부터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호칭은 아니다. 경험적으로 보자면 서울 이외의 지역 출신 여성들에게 ‘오빠’ 호칭이 주는 어감은 ‘낯간지럽거나’ 때론 어떤 ‘의도’가 내포된 것 같아 사용하기 꺼려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나와 같은 기성세대의 여성들에게 20대 여성들이 쓰는 ‘오빠’는 우선 남성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거나 권력적으로 하위를 점하는 옳지 않은 단어로 의미화 된다. 어떤 설명을 해도 ‘오빠’를 쓰는 여성은 여동생의 위치를 갖게 되는 것이므로.
   남성중심적이며 남아선호적인 우리문화에서 오빠에 대해 여동생이 가질 수 있는 존재적 의미는 악극 <홍도야 우지마라>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오빠(혹은 남동생)의 학비 마련을 위해 (매매춘 여성으로 혹은 기생으로) 희생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존재이거나, 기껏해야 오빠보다 부모의 재산 상속을 덜 받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어떤 경우에도 여동생이 오빠와 동등하거나 우월할 수는 없듯이 ‘오빠’를 매개로 한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평등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평등을 배제한 관계 맺기가 지금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 ‘오빠’를 회의해야 한다.
   ‘오빠’를 회의하기 위한 첫 과정으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호칭으로서의 ‘오빠’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시인 문정희의 시 <오빠>를 통해 읽어 본다 (연세대학교 교내 학생지『두입술』, 2001. 봄. 5호).

                                
                                 오빠
                                                            문정희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 몫으로 차지한
우리 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 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 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어 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라 불려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 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 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로 와
비단 구두 사 주고 싶어 가슴 설레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 버렸다.

 
   2) ‘오빠’, 그 일상의 정치학에 대하여

   아래의 글은 평등성이 배제된 ‘오빠’를 매개로한 남녀 관계 맺기 방식의 부당성을 공론화하기 위하여 2004년 11월, 이화여자대학교 이화리더십개발원에서 열린 제5회 교수 콜로키움에서 발표한  <오빠, 그 일상의 정치학>이다.  

   “오빠와 만난 지 60일째 되는 날이에요. 축하해 주세요~ " “제 친구 오빠는 CPA자격시험 공부한다는데 우리 오빠는 아무 준비도 안하고 있어서 괜히 제가 불안해요." “그 오빠는 저 말고 저희 부서의 다른 여자 직원을 좋아하고 있었던 거에요" “잘 알려진 사람과 결혼하는 게 부담이 되긴 하지만 오빠를 많이 좋아하니까 감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1]  "오빠를 꼭 빼닮은 아들을 낳고 싶어요!" 이상은 라디오 청취자들이 음악신청과 함께 보낸 실제 사연 혹은 최근 신문기사의 일부를 옮겨 적은 것이다. 남자친구, 친구의 남자친구, 남자선배(학교/직장), 약혼남, 남편 할 것 없이 자기보다 생물학적 연령이 많은(혹은 심지어 적은) 모든 남성을 부르는 여성들의 호칭은 '오빠'가 되었다. 남성을 부르는 ~야, ~씨, ~형 ~선배 등과의 경합에서 '오빠'가 패권을 차지한 것이다.
    “오빠, 제발 술 그만 먹고 엄마, 아버지 속 좀 그만 썩여. 하여튼 오빠 제대하면 좀 나아질 거라 우리 모두생각하고 있으니 그리 알고, 이 번 엄마 생신 때 꼭 전화 드려~" 라는 사연을 읽은 한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의 진행자는 "아, 이 오빠는 친/오빠셨군요. 어쩐지 좀 이상하다 했습니다"라고 말해, 가계 안팎 모든 남성을 아우르는 호칭으로서의 '오빠'가  ‘진짜' 오빠를 밀어내는 중임을  시사했다. 일상의 많은 명사들이 단순화, 약자화 [2]  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진짜' 오빠를 의미하는 단어만이 친/오빠로 불리면서 그 길이를 늘린 것은 '사이비' 오빠들의 거센 기세를 말해주는 듯 하다--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더니.
   나는 친/오빠라고 길이를 늘여 쓰게 한 혈연 밖의 '오빠들'이 싫다. 대학에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발을 디디기 시작했던 99년 봄부터 나는 남자선배나 남자친구를 부르는 호칭으로서의 '오빠'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고, 그러한 나에 대해 많은 여학생들은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오빠란 말 쓰지마세요! 여러분은 만인의 여동생이에요? 자존심도 없나요?" 라고 말해 여학생들을 일부러 수치스럽게 했다. 그것도 안 통한다 싶으면 “오빤 무슨 오빠! 오빠하고 어떻게 뽀뽀하고 섹스하나요? 완전히 근친상간 아닌가요!" 라는 억지소리를 해댔다. 이러한 나의 발악에 '저 여자 왜 저래?' 라고 묻는 듯한 여학생들의 저항적 표정,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그 표정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에 잊기는커녕 매번 상기(想起)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제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그대로 따라올 줄 알았었기 때문에 그 저항의 표정은 날 당혹하게 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들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혈연 밖의 남성들을 ‘오빠’라고 부르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왜 일상화되어 있고, 그것에 대해 갖는 나를 비롯한 기성세대 여성들의 불편한 심기의 근거는 무엇인지 분명히 이론화 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토대로 수많은 '누이동생'들을 다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이해 가능한 언어로 나와 기성세대 여성들이 느끼는 ‘오빠' 호칭에 대한 부당성을 설명해야 한다. 바라건대, ‘오빠'의 사전적 의미, “같은 항렬의 손위 남자형제를 일컫는 오라버니에 대한 친근한 말 혹은 어린이 말"이 그 본뜻대로 쓰이면 한다. 성질부리지 않고 ‘제대로’ 가르치면 그럴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내가 가진 ‘오빠'에 대한 불편한 심기의 근원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설명해 보려 한다. 나의 20대 적 대학의 맥락과 지금 20대 여성들의 맥락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설명의 과정이 순조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1) 80년대 학번 여성들의 맥락, 그리고 '형'
 
   선배나 연상 남자친구를 부르는 호칭으로 ‘오빠'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나의 주장에 ‘똑똑한' 여학생들이 묻는다. “그럼 ‘형'은요, 선생님 세대는 왜 형이라고 남자들을 부르셨나요?"라고. 그 질문 속에는 ‘당신 세대는 뭐 그리 옳은 호칭을 썼다고!'라는 비아냥거림이 숨어 있다. 그랬다. 대학시절 나와 또래 여성들이 연상 남자를 부르던 방식은 ‘형'이었다. 힐난하듯 질문하는 2000년대 학번의 여성들에게 설명해야 하므로 나를 성찰해야 했다, ‘형'이라는 남성중심적 호칭을 썼던 우리시대 여성들을 미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80년대 내가 다녔던 남녀공학대학교의 몇몇 남자 교수들은 대입 본고사 폐지와 졸업정원제 ‘때문에' 여학생들을 많이 입학시키게 되었다며 여학생 당사자들 앞에서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곤 했다. 학교 행정에 관여하는 남자 교수들의 수업이라도 들을라치면, 그들은 여학생들이 곧 전체 학생수의 20%에 다다르게 생겼다며 우리학교보다 여학생수가 훨씬 적은 라이벌 남녀공학대학교와의 경쟁에서 뒤질 날이 머지않았다며 한숨쉬었다. 더 폭력적인 남자 교수는 치마 입은 여학생은 교실 뒤로 가서 앉으라고까지 했다. 여학생이 늘어나는 것도 골치 아픈데 ‘치마'라는 표상으로 늘어나는 여학생 인구를 실감하고 싶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참[眞] 제자'인 남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앞자리에 ‘치마들'이 앉아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 닦아 놓으니 여우가 지나가네' 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그들의 표정이 그랬다.
   여하튼, 입학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홀대를 당했던 여학생들은 그것이 차별이라고 인식하지는 못했었던 것 같다. 그 때 우리에게 성차별 개념이 있었던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뭔가 부당한 대접이 우리에게 가해지고 있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들 남자 교수들이 선호하는 남학생들보다 우리가 결코 모자라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때 우리 행위방식의 기준은 ‘남성'이었다. 남성보다 월등하거나 적어도 비슷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졌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한 단어가 아님을 알면서도, 남성 그들을 기준으로 하는 단어인 줄 알면서도 '형'을 차용했다.

     (2) ‘형'의 정치적 역할: 여성성의 부정,  그러나  그들과  맞장 뜨기

   ‘형'이라는 호칭을 차용하기 위해 우리가 끌어왔던 논리는 그것이 ‘학형(學兄)'의 줄임말이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우리의 기준이 남성이었기 때문에 ‘형'은 ‘치마'로 대표되는 우리의 여성성을 부인하거나 여성임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우리의 강박을 담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로 또 20% 운운할 테니까. 그들에게 캠퍼스에 ‘그렇게 많은' 여성이 있음을 상기시켜야 좋을 일이 없을 테니까. 되도록 없는 듯이 학교에 다니던가, 그것이 어렵다면 남학생들과 구별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남자 교수들의 심사(心思)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의 전략을 바로 보았는지 그 때 당시 많은 남자 교수들은 여학생들을 “~군(君)”으로 부르길 즐겼으며(그렇게 부르는 것을 여학생 우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여성성을 부인 당했다는 불쾌감보다는 적어도 여성성 때문에 우리가 눈에 띄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우리가 가진 여성성을 부인하고 여성임을 드러내지 않고자 한 노력으로서의 ‘형'은 아무리 긴 설명을 한다 해도 그것이 남성중심적 호칭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반(反)여성적 혹은 반(反)여성주의적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적어도 거기에는 가부장적 맥락을 거스르고자 하는 여성으로서 우리의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성을 부인하면서까지 또래 남성들에 비해 전혀 모자라지 않음을 증명해내려고 했던 나름대로의 정치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치성을 통하여 우리가 맘대로 통제되지 않을 것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았는지 실제로 ‘형'이라 불리는 것을 달가워했던 남자선배들은 없었다. 요즈음 가끔 보게 되는 그들 중 만용을 부리는 몇몇은 “이제 그만 오빠라고 좀 하지~?”라고 말하면서 그 때 당시 감히 발설할 수 없었던 소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 여자 후배들 중 누가 답한다. “형, 많이 컸다, 감히 그런 소리도 하고. 옛날엔 꿈도 못 꿨던 소리 아냐?”
   그랬다. 그 당시 그들은 여자 후배들에게 깍듯했고 어느 면에선 무서워했던 것도 같다. ‘형'은 적어도 청자(聽者)에게 권위나 위계상 상위를 부여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여성성을 부인한 대가로 청자와 ‘맞장 뜰 수' 있도록 우리의 위치를 끌어 올린 것으로 연상 남성에 대한 호칭 ‘형'의 역할을 평가하고 싶다.
   ‘형'을 불러낸 그 당시 남성중심적 맥락, 그 맥락을 거스르려는 당시 여성들의 행위자성을 집어내는 일은 ‘오빠' 호칭에 대해 나와 기성세대 여성들이 갖는 거부감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배경이다. 80년대 학번 여성들의 ‘형'이 가진 정치성을 배경으로 90년대 이후 학번 여성들의 ‘오빠'를 비추어보면 80년대 여성들이 왜 ‘오빠'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 설명 가능할 것이다.

     (3) 90년대 이후 학번 여성들의 맥락,  그리고 '오빠'

   아직 정확하게 조사된 바는 없지만 경험적으로 80년대 후반 학번에 의해 본격적으로 ‘오빠'가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 ‘형'을 거부하게 된 무슨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80년대 후반부터 유행처럼 번진 캠퍼스 ‘연애지상주의'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우리사회가 국경을 넘어 온 대규모의 세계인들과 정면으로 만난 것으로서 88년 서울 올림픽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여기저기 내걸린 ‘86은 디딤돌, 88은 도약대' 라는 ‘경구'(警句)는 세계인(사실은 북미와 서유럽계 백인들)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국민 국가의 틀 속에 있었던 한국인들이 저들이 가진 물질적 풍요로움은 물론 자유와 해방도 꿈꾸게 되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해방적 분위기가 대학에서는 어떻게 흡수되었을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버젓이' 걸어 다니는 캠퍼스커플, 일명 CC가 출현한 것은 그 무렵이다. 분명히 80년 대 중반까지만 해도 연애하는 커플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여관에는 갔을망정, 백주(白晝)에 누구에게나 눈에 띌 수 있는 캠퍼스를 손잡고 활보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주 ‘내놓은' 커플이 아닌 다음에는. 그러나 80년 대 후반, 90년대 초반부터는 그 양상이 달라졌다. 학교 앞 미국 브랜드의 패스트 푸드점 주변엔 그 곳이 미국의 영토라도 되는 양 ‘과감히' 키스를 하는 커플도 있다는 소문들이 나돌았다. 또한 대학가 은폐된 성문화의 상징이었던 어두운 칸막이식 카페가 조도(照度)를 높이는 것과 함께 칸막이의 높이는 낮춤으로써 개방적 성문화 시대가 도래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커플들은 다른 사람들도 다 볼 수 있는 카페의 안락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 방처럼 사방이 둘러쳐진 칸막이 안에서나 할 수 있을 법한 애정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개방적 성문화는 소수 퀸카와 킹카들만이 전유(專有)했던 연애라는 ‘사치'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99년도에 처음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놀랐던 것은 수업시간의 토론 중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이성친구에 대한 얘기를 스스럼없이 한다는 것이기도 했지만, 과반수의 학생들이 연애중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수의 학생들이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 이외에 또 한 가지 생소했던 것은 그들의 연애기간이 몇 개월 단위로 계산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잦은 기념 파티, 예컨대 한 달, 50일, 100일 등의 기념파티는 이들의 연애가 몇 년 단위로 이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반증이었다. 며칠도 안 되어 끝이 나버리는 연애이니 한 달 혹은 50일이 되는 날이 스스로에게도 기념하고 싶을 만큼 대견한 것이다. 왜 이들이 단기성(短期性) 연애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조사해 본 적은 없지만 (실제로 그들 스스로도 그 이유는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히려 왜 연애를 몇 년씩 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아마도 발달된 통신 수단이 그 이유 중 하나일 수 있지 않을까. 요즈음의 커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서로에게 문자를 날리고, 각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글을 남기고, 휴대전화 특별요금제로 수 시간씩 통화하고, 휴대전화 위치추적 기능으로 상대방의 위치와 이동경로 정도는 앉아서도 꿰뚫는 등 우리 세대의 한 여성과 남성이 만나 몇 년이 지나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대화는 물론 상대방에 대한 검열을 일상화한다. 그러니 금방 시들해지고, 그만큼 빨리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짧아진 연애는 결국 연애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수의 파트너를 경험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맥락이 90년대 학번 이후의 여성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한 남성과의 연애기간이 전 세대보다 훨씬 짧아졌다는 것은 연애가 끝난 후 바로, 아니면 그 기간 중이라도, 다른 남성을 욕망해야 함을 의미할 테고, 그것은 현실과 모순 없이 그 욕망을 실현시켜 줄 장치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어떤 한 남성과 연애 중이라 할지도 연애시장에서의 시장성(marketability)을 늘 확보하고 있어야 그 연애의 종료 후 다른 남성과의 연애가 가능한데,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제가 바로 ‘오빠'라는 생각이 든다. ‘오빠'가 왜 여성들의 시장성을 높여주는 항시적 장치인가.
   여성들에게 연장자 남성을 부르는 호칭으로서의 ‘오빠'가 모든 남성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성들이 특정 연장자 남성(들)과 의도적으로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두고자 할 때 ‘오빠'는 동원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 사귀고 있는 남성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친근감이나 호감을 표현하고 싶은 남성들에게만 ‘오빠'가 의도적으로 활용된다는 것이다. 이전 세대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연애에 가담하는 한편 그것이 단기화되는 맥락에서 교제 중인 남성 이외의 다른 남성들과 언제라도 낭만으로 환원시켜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친근감을 유발할 장치를 갖고 있다는 것은 요즘의 맥락에 적합한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이나 ‘선배'로부터 연인으로의 변신보다는 ‘오빠'에서의 변신이 훨씬 용이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오빠'는 ‘형'이나 ‘선배'가 갖고 있지 않은 가부장적 낭만성을 이미 태생적으로 갖고 있지 않은가.
   ‘오빠'가 배태(胚胎)하고 있는 가부장적 낭만성이란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전제로 남성의 권위적 지위가 낭만으로 포장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권력 각본이 낭만 각본으로 포장될 때, 남성이 가진 권력은 권력이 아닌 적극적 보호, 애정, 그리고 남성다움으로 여성들에게 수용된다. 따라서 여성이 종속적이면 종속적일수록 그 남성은 더욱 권력적이며 더 남성다운 것으로 인식되는데, 이것은 결국 그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더 낭만적으로 개념화하게 한다. 더 많은, 더 진한 낭만은 결국 여성과 남성의 권력관계를 극대화시키는 ‘오빠'로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오빠’야 말로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의 몸과 마음에 대한 권력을 보호, 애정, 그리고 남성다움으로 포장하는 가장 확실한 기제가 아닌가. [3] 그 기제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자신에게 성폭행을 저지른 남성에 대한 묘사를 하면서도 어떤 여성은 “그 오빠하고 한 달 사귀었는데요... 라고 말해 나를 질리게 한다.
   90년대 이후 학번 여성들이 사용하는 ‘오빠' 호칭에 불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여성 스스로가 남성들의 권력을 만들어주고 그 권력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언급했듯이 그것이 연애라는 대중적 행위에서 소외되지 않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는 있지만 ‘정치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 여성들이 불편해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인 것이다. 기성세대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서의 젠더 권력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고자 몰두하고 있을 때, 뒤에 오는 여성들이 사적 영역에서의 젠더 권력 불균형을 생산, 재생산, 강화하고 있으므로, 또한 이 여성들이 그러한 양상을 공적 영역에서도 재현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으므로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 여성들이 분노하는 것이다. 낭만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권력의 기제를 바로 보지 못하는 후배 여성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4)  바른 관계 맺기에 대한 계몽으로

   워피안 이론(WhÖrfian theory)은 언어가 우리의 인식을 지배한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영어 Man이 남성은 물론 인간을 뜻하는 단어로 의미화되었으므로 남성은 영어권 사회 남녀 모든 구성원을 대표하거나 지배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물론 기득권 남성들이 Man을 남성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뜻하는 단어로 만들었겠지만 말이다. [4]  언어가 누구의 어떤 인식을 반영하면서 생성되는가를 분석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생성된 그 언어가 다시 인간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따지는 데 필요한 틀을 제공하는 워피안의 이론도 의미 있다. 이 이론은 ‘오빠'가 여성들에게 준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나의 관찰에 의하면 ‘오빠'는 여성들이 유아화(幼兒化)되어 가는 데 일조하고 있다. ‘누이동생'의 정서를 내면화하고 재현해야 연애라는 대중적 현상에 항상 편입할 수 있으므로 여성들은 유아화되어야 했을 것이다. 혀 짧은 소리, 소녀 표상의 긴 생머리, 주름진 미니스커트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양말--일명 키덜트(kid+adult의 합성어) 패션이 유행하는 것이 ‘오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이들은 동료나 비슷한 또래에 대한 호칭으로 ~씨가 적당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그 방식은 너무 ‘어른스럽다'는 것이 이유이다. 이 여성들은 어른스러운 재현 방식으로 ‘오빠'의 권력을 위협하거나 그들과 동등해지기를 두려워한다. 섹스를 하면 했지 ‘어른스러운' 호칭을 거부하는 이들은 성애화(性愛化)된 유아들이다. 유아화되는 여성들은 많은 ‘오빠'들과의 풍부한 낭만을 즐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권력 위계의 말단에 놓이기를 자처했으므로 남성과 평등한 관계 맺기에 실패하고 있다, 공/사의 영역 모두에서.  
   ‘오빠'에 대한 나와 기성세대 여성의 분노는 단순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후배 여성들이 불평등하고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관계 맺기 방식을 나름대로의 전략이라고 취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그 방식을 통해 이들은 근시안적이고 개인적인 낭만 자원을 손에 넣을 수는 있겠지만, 보다 장기적이면서 그룹으로서의 여성 전체의 권력을 형성하는 데에는 치명적인 손해가 끼쳐지고 있음을 간과하고 말았다. 그러니 ‘오빠'가 함축하고 있는 그 일상의 정치성에 대해서 계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분노와 뒷소리는 ‘오빠'만큼이나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방법이었다. 이제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오빠'에 대한 후배 여성들의 성찰을 도와야 하며, 그래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옳을 뿐만 아니라 여성 전체의 권력 형성에 도움이 되는 방식의 관계 맺기를 배울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3) ‘오빠’를 회의하게 하는 질문들

   학부생들에게 <오빠, 그 일상의 정치학>이라는 글을 소개하고 그 글에 대한 토론을 유도해 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글에 대한 거부감을 감추지 않는다. 여학생들과 남학생들 모두 ‘오빠’라는 호칭이 동원해주는 ‘친밀감’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오빠’라는 호칭 때문에 여자 후배와 남자선배간이 비교적 단시간 내에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마치 가족처럼. 그럼 나는 이렇게 질문한다. “여학생들은 자신의 남편, 남자친구, 혹은 친/오빠, 그리고 남동생을 다른 여성들이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또 그 남성들을 다른 여자들이 ‘선배'나 ‘OO씨’라고 부르는 것도요. 여러분은 아내, 여자친구 혹은 여동생, 누나의 입장으로 어느 호칭을 더 선호하나요?” 재미있는 것은 거의 모든 여학생들이 아내, 여자친구, 혹은 여동생과 누나의 입장으로서 다른 여성들이 자신의 남편, 남자친구 혹은 친/오빠와 남동생을 ‘오빠’로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다른 남성들을 ‘오빠’라고 부르고 있다. 남학생들에게도 묻는다. “남학생들은 자신의 아내, 여자친구, 혹은 여동생/누나가 나이나 학번이 높은 남성들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또 그 여성들이 다른 남성을 ‘선배’나 ‘OO씨’로 부르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어느 쪽을 더 선호하나요?” 재미있게도 남학생들도 대부분 자신의 아내, 여자친구, 여동생/누나가 다른 남성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후배 여성들이나 연애중인 여성에게 ‘오빠’로 불리기를 기대하거나 강요하고 있다.
   나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여학생들은 결혼한 남자선배에게 전화를 건다고 상상합시다. 전화 용건은 동문회 모임이라고 하지요. 전화를 걸었더니 선배의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고 합시다. 선배의 이름은 이 석우입니다. 그 부인에게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대답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나서 “동문회 일 때문에 전화했는데 이석우 선배님 계신가요?”이다. 그러고 나서 선배가 전화를 바꾸어 받으면 “석우 오빠, 저 OO인데요...”라고 할 것 같다고 한다. “선배의 부인에게는 그 선배를 이 석우 선배님이라고 하고는 그 선배에게는 ‘오빠’라고 하네요. 그 이유가 뭐지요? 그 사실을 그 부인이 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왜 그런 두 가지 호칭을 쓰시나요?” 남학생들에게도 묻는다. “자신의 부인이나 여자 친구 앞에서 다른 여성들이 자신을 OO씨, OO선배라고 불러주는 것과 ‘오빠’라고 부르는 것, 어느 편을 더 선호합니까?” 대부분의 남학생들도 역시 ‘오빠’보다는 OO씨와 OO선배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부인이 옆에 없다면요?” 라는 질문에 그들이 머뭇거리는 이유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순 때문이다. 부인이 없을 때 왜 다른 여성들로부터 ‘오빠’ 라고 불리고 싶은 것일까?
   ‘오빠’가 후배 여성과 선배 남성의 친밀감을 높여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성과 여성,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내와 남편, 여자친구와 남자친구의 관계에 갈등을 일으키는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연애기간 중에 ‘오빠’라고 불렀던 남성과 헤어졌다고 가정하고, 그 뒤에 그를 어떻게 불러야할지를 생각하게 해 보면,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 남성을 ‘오빠’라고 부르기를 꺼려한다. 이 경험은 ‘오빠’가 갖고 있는 낭만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더 이상 낭만적 관계에 있지 않은 헤어진 남성에게는 ‘오빠’라고 부르지 않으면서 왜 대부분의 손위 남성들에게는 ‘오빠’라고 하며, 남성들은 왜 그 호칭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일까?
   낭만적 관계에 있는 남성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도 역시 문제는 있다. 어느 캔 커피 음료 광고에서 보듯, 후배 남성은 선배 여성에게 이성적 친밀감을 느끼며 다가설 때 ‘누나’라고 하지 않는다. 광고에서 그 남자 후배는 여자선배에게 말한다, “선배, 그 옆자리 비었나요?” 어느 화장품 광고에서도 여자선배에게 이성적 관심이 있는 듯한 남자 후배가 그 여자선배에게 말한다. “선배는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더 예뻐요”라고. ‘오빠’는 연애 중인 여남 관계에서 여성과 남성의 위계를 확실하게 해 주는 장치이지만 그 위계는 ‘낭만’으로 포장되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 둘의 관계가 낭만적이면 낭만적일 수록 ‘오빠’는 더 자주, 더 강하게 동원되는 장치이다. 반면 ‘누나’는 연애 중인 남녀 관계에서 남성이 나이가 적다할지라도 상대 여성을 부를 때 동원되지 않는다. 그 둘의 관계가 더욱더 낭만을 향해 지속될 때 ‘누나’는 차라리 없어져버린다. ‘누나’는 여성의 위치를 ‘오빠’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는다. ‘누나’는 낭만 관계에서 언제든지 ‘너’ ‘OO야’로 환원될 수 있는 불안한 장치인 것이다. 연하 남성은 연상의 상대 여성에게 ‘누나’라고 하지 않는데, 왜 연하 여성은 연상의 상대 남성에게 ‘오빠’라고 하는 걸까?  ‘오빠’를 그대로 유지시키기 위해 ‘누나’를 부활시켜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누나’가 연애와 동시에 사라지는 호칭인 것처럼 ‘오빠’ 역시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여성과 남성 간에 호칭과 관련된 내용을 성찰하고 평등하고 올바른 호칭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는 상호간 호칭이 관계의 성격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등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평등한 호칭을 써야 하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공/사 영역을 막론하고 나이가 많은 대부분의 남성에게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한 문화는 분명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상하로 규정하는 면이 있다. 그것을 여성들이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모든 남성들에 대해 누이동생의 위치를 스스로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오빠'라니, 누가 여성들의 ‘오빠’라는 것인가?
  
(중략)

   5) ‘오빠’를 회의해야 하는 이유

   법적으로는 아직 미성년이지만 문화적으로 성인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여남 대학생들이 성인으로서 처음으로 평등한 방식의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걸림돌이 되는 장치 중 하나가 호칭으로서의 ‘오빠’이다. 여성을 ‘로맨틱한 여동생’으로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가족도 아니며, 우리나라의 가족 역시도 성평등한 구성체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인으로서의 여성과 남성이 가족적인 호칭 ‘오빠’를 매개로 관계 맺기에 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호칭으로서의 ‘오빠’가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것은 두 말 할 나위 없다.
   나는 성인으로서 첫 만남을 갖는 남녀공학대학교의 대학생들이 어떤 방식으로 선배와 후배를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그 논의 과정 속에서 ‘오빠’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중심주의, 나이에 따른 서열주의, 그리고 가부장성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가치들을 객관화 시키면서 비판할 수 있다면 여성과 남성, 그리고 선배와 후배 간의 다른 대안적 질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여남공학대학교는 이성애적 관심 없이 남녀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문화적 각본을 결여하고 있는 각박한 공간이다. 지금으로선 로맨틱한 감성이 유발되지 않는 사이라면 개인 여성과 개인 남성은 함께 고민할 공통의 주제도 대화 소재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각박한 공간 때문에 남녀 구성원들은 서둘러 ‘오빠’를 매개로 그 각박성을 극복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남성중심주의, 나이에 따른 서열주의, 그리고 가부장성을 담지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호칭으로서의 ‘오빠’만 제대로 사유할 수 있어도, 그것이 동반하는 불필요한 로맨스적 위계를 제거할 수만 있어도 남녀공학대학교는 지금보다 훨씬 문화적으로 풍성하며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관계를 맺고 키워가는 공간으로 다시 구성되어질 것이다. 그것이 ‘오빠’를 회의해야 하는 이유이다.  
 
(후략)

각주 [1]. 박 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와 결혼할 것으로 알려진 변호사 서향희씨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발췌한 것이다(이데일리, 2004. 11.2). 기사의 원문은 "솔직히 잘 알려진 사람과 결혼하는 게 부담이 되긴 한다. 하지만 오빠(서씨는 박 회장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쓴다: 글쓴이 강조)를 많이 좋아하니까 다 감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인데, 이 때 기자는 괄호안의 부연 설명을 통해 마치 서씨의 박씨에 대한 호칭이 예외적인 것인냥 다루고 있다. 기자가 느낀 예외성이라는 것이 서씨의 직업 '변호사'를 기준한 것인지 상대 남성 박씨의 '전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배경 혹은 현재의 직위 '회장'을 기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씨와 동시대 여성(70년대 생)들에게는 일상으로 쓰이는 이 호칭을 마치 예외인 듯 다루고 있는 기자의 작위적 태도가 재미있다.

각주 [2]. 현사심, 청갈자, 여교개, 여커리, 학관, 중도 등은 각각 현대사회의 심리, 청년기 갈등과 자기이해, 여성교육개론, 여성커리어와 리더십, 학생회관, 중앙도서관의 줄임말이다.

각주 [3]. 오빠에 대한 나의 부정적 인식을 드러낼 때 가장 흔하게 남학생들로부터 받는 질문은 "그럼 누나는요?"이다. 흔히 누나와 오빠가 같은 위치를 의미하는 성별에 따른 상대적 호칭이라고 알고 있지만 오빠가 포함하고 있는 가부장적 낭만성을 누나는 갖고 있지 않다. 그 점 때문에 누나와 오빠가 같은 방식의 권력을 가진 상대어라고 할 수는 없다. 연하 남자가 연상의 아내에게 누나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가수 이승기가 부른 <내 여자라니까>는 연상의 여자 친구에 대한 연하 남자의 가부장적 사랑을 표현하면서 누나로서의 여성의 위치를 무화하고 끌어내린다. 그는 연상의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면서 노래를 시작하지만 끝부분으로 가면서 ‘넌 내여자’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누나는 언제나 ‘너’가 될 수 있다. 누나는 남성과의 상대적 위치에서 잠시 동안만의 상위를 점유할 뿐 낭만과 함께 그 위치를 공고히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각주 [4]. 만일 로뎅이 턱을 쥐고 생각에 잠긴 남성을 조각한 작품, <생각하는 사람>의 대상이 여성이었다면 그 작품의 제목이 여전히 <생각하는 사람>이었을까 생각할 적이 있다. 아마도 <생각하는 여인>이 되었거나 ‘생각'과 ‘여인'은 어울리지 않으므로 <근심하는 여인>쯤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생각하는 남자=생각하는 사람’으로 치환될 수 있지만 ‘생각하는 여자=생각하는 사람’으로의 치환이 어렵다. 우리의 인식이 여자를 사람 일반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 관습은 우리의 인식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관습이 여성을 일반 인간으로 대표하는 않는 그 인식을 계속 강화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2011/04/06 19:11 2011/04/0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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