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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13:57, 기억력강화_Scrap
인권운동사랑방 미류씨의 블로그 글
http://blog.jinbo.net/aumilieu/755



병역을 거부해야겠다



얼마전, 만약 병역거부를 한다면 어떤 사유서를 쓰겠냐는 질문을 마주하고 난감했다. (당시 질문에 포함되어있던 한국의 군사주의나 국가주의,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평화나 생명이 그리 쉬운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에도 이런 꾸물거림이 있지는 않았을까. 얼마간 그 질문을 게워내다가, 나도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후배가 너무 미웠던 적이 있다. 십여 년 전인 듯하다. 계속 나를 피하던 후배를 겨우 만났던 날,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먹을 쓸 줄 알았다면 한 방 날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때릴 줄 몰랐다. 그게 조금 억울하기도 했지만 곧 세상에는 몰라서 좋은 것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십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한 사람을 때린 적이 있다. 진심을 다해 따귀를 날린 적이 있다. 그래서 이제 안다. 나도 누군가를 때릴 수 있구나.


나는 또 모르겠다. 내가 마주한 컴퓨터 모니터 같은 화면을 보여주며 버튼을 눌러야 하는 상황이 될 때, 그 화면에서는 전해지지 않는 단발머리 소녀의 눈웃음을 떠올릴 수 있을지, 허리가 굽은 노인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버튼을 누르지 못할까, 내가? 누군가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며 일방적인 폭력을 가할 때, 만약 내 손에 칼이 들려 있다면, 칼날의 끝이 상대를 향하도록 움켜쥐는 걸, 못할까?


그래서 나는 병역을 거부해야겠다. 폭력이 아닌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우리 모두. 어떤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배운 것들이 누군가를 때리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학교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한 아이의 소식을 듣고도 안타까워 탄식을 하는데 수많은 사고를 필연적으로 낳는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 건 다만 생명의 소중함을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여성연쇄살인범의 행적에 분노하는 많은 사람들이, 연쇄살인범보다 더 연속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 사람에게 ‘군인’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심지어 고마워하는 모순도 다른 방법을 못 찾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전쟁’이라며 오히려 빚진 마음을 강요하는 ‘국가’에게, 당신이 가르치려는 것들을 나는 배우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해야겠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
한겨레21 지난 특집에서 "내가 쓰는 가상 병역거부 소견서" 코너가 미류씨에게 제안이 들어갔던 것 같다.
"우리 안의 보편성" 이란 제목으로 글을 준비하려고 했다고 하던데, 썼어도 참 좋았겠다 싶네.
왜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의 소식에 안타까워 하지만, 왜 전쟁엔 반대하지 않습니까?

폭력이 움직이려면, 나와 적, 그리고 그 적은 비인간화되고, 또 나를 위협하는 폭력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즉,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사고 속에서 폭력은 "즐겁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교통사고 당한 아이는 우리이며, 나를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군인이 죽이는 누군가는 적이며, 나를 해할지도 모르는 존재다.
매우 도식적이지만, 제노사이드 연구 등에서 폭력의 작동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연쇄살인범이 도망치다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슬퍼할까? '적'을 죽였을 때 우리가 가지는 사고방식이란게 이렇다.

.... 하나 더. 요즘 생각나는 것을 쓰자면 (특강에서 예비역들을 좀 많이 만나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자신이 가진 경험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이 부정되기 때문이다. 2년이 넘는 그 소중한 자신의 청춘이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미 억울함이 전제되어 있는 시간. 불가항력적으로 육체에 새겨진 시간.
군가산점제나 EBS 강사의 말에 폭발하는 이유도, 스스로의 시간이 '존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병역거부는, 군대 어쩔 수 있나, 다 끌려갔다오는거지. 라는 "어쩔 수 없다"라는 자기긍정의 마지노선까지 비판한다.
살인행위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명시적이진 않지만, 논리적 구조상 부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시간을 부정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비판적 활동이나 사유의 토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베테랑들이 반전운동에 참여하거나,
하워드 진이나 더글러스 러미스처럼 자신의 전쟁체험이 두고두고 평화주의 사상의 기원이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것이 이 차이를 만들까.

2011/06/19 13:57 2011/06/1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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