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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8 17:52, 보내자원고_Column
서초동 대법원의 ‘아이히만’

 
‘박종철 사건’ 수사검사였던 박상옥 대법관은 인사청문회에서 “지시에 따라”라는 말을 반복했다.
법과 양심보다 상부의 지시를 우선했다는 뜻이다. 그의 임기는 2021년에야 끝난다.

 
임재성 (평화 연구자)
[401호] 승인 2015.05.21 
 
인정하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검사, 그것도 축소·은폐 수사를 했다는 혐의의 주인공인 박상옥은 대한민국 최고법원의 법관이 되었다. 6년 임기는 2021년에야 끝난다. “인사청문회 준비를 하면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장래 희망이 법관으로 기재돼 있는 것을 보고 감회에 젖었다”라며 멋들어지게 취임사까지 한 박상옥 대법관은 이 임기를 다 채울 것이다.
 
6년 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이름이 필요하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와 참여연대는 ‘반쪽 대법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문사건 은폐 의혹의 당사자이면서, 대법관 후보 임명동의안 국회 표결 중 역대 최저인 158명(모두 새누리당 의원)의 참여로만 임명된 대법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상옥 대법관을 오래 기억하기 위한 이름으로 ‘반쪽 대법관’은 충분치 않다.
 
청문회 내내 그가 가장 많이 반복한 말은 “지시에 따라”였다. 범인이 2명이라고 조작한 경찰 조사를 그대로 따라 4일 만에 기소한 것, 당사자 참여도 없이 현장검증을 한 것 모두 유례없는 일이었으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만 반복했다. 박상옥 대법관이 속했던 수사팀의 직무유기는 당시에도 명백한 것이어서, 해당 수사팀이 해체되고 세 번이나 수사가 반복되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 “당시 검찰이 외압에 굴복, 수사권을 적절하게 행사하지 못했고 진실 왜곡을 바로잡지 못했다”라고 공식 평가를 내렸다. 사과든 사퇴든 다 떠나, 부끄러워했어야 한다. 그런데 박상옥 대법관은 수사팀 막내 검사였기 때문에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강변했다. 당당했다.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대법관 후보자가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고문사건 수사에 대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순간, 독립성을 최고 가치로 삼아야 할 최고법관의 자세 따위는 내팽개쳐진 지 오래였다. 경기고-서울대를 나와 스물일곱 살에 서울지방검찰청에 부임한 이후 승승장구했던, 목전에 대법관 자리까지 놓아둔 초엘리트의 집념만이 넘쳐났다. 그 집념 속에서 두 가지가 명확해졌다. 저 사람은 국가권력에 의해 한 생명이 욕조에 처박혀 죽은 사건을 수사하면서 법과 양심보다 상부의 지시를 우선으로 삼았다는 것. 그 지시만을 받들어 수사한 것에 대해 지금도 온전히 고개 숙이지 않고 당당하다는 것.

 
 
전범 재판에서 ‘국가의 명령’에 최선을 다했다고 강변한 아이히만
 
아이히만도 그랬다. 유대인을 수용소로 실어 날랐던 수송부서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자신의 일은 나치 법률하에서 그릇된 일이 아니었다고 강변했다. 자신은 법을 지키는 시민이었고, 국가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그는 당당했다. “나의 유죄는 복종에서 나왔으며, 복종은 미덕이다”라고 외쳤다. 이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는 최선을 다해 개인적 발전을 이루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떠한 동인도 없었으며, 무사유(無思惟)의 근면함이 그를 시대의 범죄자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평했다.
 
박상옥 대법관이 박종철을 통해 만들어진 87년 헌법이나 지금 이 사회의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일말의 이해라도 있다면, 자신의 경력으로는 대법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야 한다. 자신에게 쏟아진 비판에 수치스러움을 느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지시에 따랐다며 당당했고, 자신의 눈앞에 놓인 대법관 자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 자체가 무사유의 방증이다.
 
기억하자. 우리는 6년 동안 아이히만을 닮은 대법관을 두게 되었다.
2015/05/28 17:52 2015/05/2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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