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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9 19:21, 보내자원고_Column
학대와 체벌은 다를까?

현행 법령은 아동(학생)에게 가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체벌을 금지하자는 목소리는 미약하다. 체벌이 학대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을 잊지 말자.

[445호] 승인 2016.04.01 

임재성 (평화 연구자) 



몸체(體)자와 벌벌(罰)자의 합인 ‘체벌’은 글자 그대로 ‘몸에 직접 고통을 주어 벌한다’라는 의미다. 영어로도 ‘corporal punishment(신체적 처벌)’인데, 이처럼 ‘신체성’은 체벌의 핵심이다. ‘사랑의 매’나 ‘교육적 체벌’ 등 은유나 수식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결국 타인의 신체에 물리력을 가한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체벌이란 다른 인격체에 대한 구타이자 폭행이다.

아동·청소년은 ‘미숙’하기 때문에 때려서라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이들의 논리다. 폭력의 대상을 열등한 것으로 규정해, 그 정당성을 찾는 오래된 방식이다. 그러나 아동·청소년에 대한 체벌이 교육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구체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경험적 연구를 통해 체벌의 교육적 효과가 없다는 점, 체벌을 통해 아동·청소년이 폭력과 복종을 내면화하고 학교폭력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 등이 명확하게 입증되고 있을 뿐이다. 체벌을 당한 아이들의 감정을 조사한 한 연구에서, 그 어떤 아이도 체벌 이후 ‘반성’이나 ‘미안함’을 느꼈다고 응답하지 않았다. 체벌을 당한 아이들이 품었던 감정은 당연하게도 무서움·화남·끔찍함·창피함·외로움이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아동·청소년에 대한 모든 형태의 체벌을 금지하자는 목소리는 희박하기만 하다. 여론조사에서 체벌이 필요하다고 응답하는 비율은 늘 80%를 상회하고 있으며, “말이 안 통하는데 어떻게 가르치느냐” “맞을 만한 짓을 하면 때려야 한다” 같은 언어가 단단한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연일 언론을 채우는 끔찍한 아동학대 사건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학대 행위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라’고 외치고 피해 아동의 사연에 가슴을 치면서도, 학대와 체벌은 다르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사랑의 매와 분노의 매가 다르다는 것은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다. 자신의 의도에 따라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 아이들에게는 맞는 이유가 사랑이든 분노든 다를 바 없다.

학대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수갑 찬 괴물에 의해서만 일어나지 않다. 2014년 아동보호 전문기관에 접수된 사례를 기준으로 아동학대는 1만72건이었고, 이 중 81.8%가 부모에 의해서 발생했다. 실제 건수는 신고된 건수보다 훨씬 많을 수밖에 없기에 2014년 한 해만 해도 수만명의 부모가 아동학대를 저지른 것이다. 체벌이 부모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되는 나라에서, 가정 내 체벌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때리는 자는 무뎌지고 맞는 자는 자포자기하게 된다. 이처럼 학대는 체벌의 과정이자 합으로서 발생한다. 체벌이 근절되지 않는 한 아동학대를 막을 수 없다.



꾸준한 캠페인으로 아동의 ‘체벌 경험’을 한 자릿대로 줄인 스웨덴

학대에 대한 신고와 처벌은 사후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거부감은 있겠지만 아동·청소년에 대한 체벌 금지를 논해야 한다. 이미 아동복지법이나 초·중등 교육법 시행령에서는 아동(학생)에게 가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드물다. 법으로 ‘금지’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스웨덴은 1979년 부모에 의한 체벌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면서 2년 동안 90%의 가정에서 아이·청소년을 때리는 것이 적법하지 않다는 인식을 갖도록 하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설정했다. 제정 당시 70% 이상의 반대 여론을 뚫고 겨우 제정되었으나, 꾸준한 캠페인 결과 2000년 이후 스웨덴 아동의 체벌 경험은 한 자릿대로 떨어질 수 있었다. 아동학대 문제가 해결된 것은 물론이다. 우리의 체벌금지법도 그러해야 한다. 인식의 전환, 긍정적이고 비폭력적인 형태의 교육으로 옮아갈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지원과 정책이어야 한다.

2016/04/09 19:21 2016/04/0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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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9 19:15, 보내자원고_Column
50년의 침묵, 또다시 ‘가만히 있으라’

‘12·28 한·일 외교장관회담 공동 기자회견문’은
더 이상 위안부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합의문이었다. 
합의문은 망각이라는 또 다른 범죄를 노골적으로 실행하려 하고 있다.

[437호] 승인 2016.02.01

임재성 (평화 연구자) 

2015년 12월28일자 ‘한·일 외교장관회담 공동 기자회견문’(이하 합의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라는 합의문이었다. 합의문 1142자 중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읽으면서 가장 굵게 박히는 단어가 ‘침묵’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위안부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합의문 발표 직후 “우리의 아이나 손자, 그리고 그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해야 한다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당연하다. 그는 합의문을 쉽게 풀어서 설명했을 뿐이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합의문이 무효라고 주장한다. 아니다. 합의문은 범죄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중의 범죄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조직적인 전시 강간 범죄이고, 다른 하나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 죄를 망각했다는 범죄다. 많은 이가 일본 정부에 첫 번째 범죄에 대해 사과하고 법적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다. 이번 합의문에 대해서도 일본군에 의한 전시 강간 범죄를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그것이 전부일까? 합의문은 망각이라는 두 번째 범죄를 노골적으로 다시 실행하려 하고 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국내 거주자 최초로 본인이 위안부였음을 증언했을 때, 세상은 위안부라는 조직적 강간 시스템 자체의 잔혹함에도 놀랐지만, 그 피해자들이 전쟁이 끝나고 50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해왔다는 것에도 충격을 받았다. 수많은 전(前) 위안부 여성들은 피해의 경험을 ‘내 자신의 치욕’으로 받아들이고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한 채 살아왔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경우도 빈번했다(이 망각의 범죄에서 한국 사회 역시 공범이었다).

1991년 망각의 범죄에 균열이 갔던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위안부가 아니다”라는 피해자의 절규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사회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1990년 11월 결성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를 청취하고 기록하는 노력 속에서 등장했다. 이 조사와 호소를 바탕으로 비로소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래서 피해자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자와 듣는 자의 공동 작업이다.



망각하지 않고 소녀상 옆에서 다시 말하고, 다시 들어야 할 때


합의문은 이 공동 작업의 중지를 요구한다. 할머니들의 의사 한번 물어보지 않고 핵무기를 해체하듯 불가역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더 이상 문제 삼을 수 없다고 한다. 사과의 진정성, 배상 방식의 적절성을 논하기 이전에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회를 닫아버리는 합의문의 내용은 망각의 범죄 그 자체다.

무엇보다 합의문 중 ‘소녀상’ 이전이 언급된 것은 처참하다. 소녀상은 2011년 12월14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1000차까지 이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매주 수요일 할머니들은 일본 대사관 앞에 모였고, 초라한 마이크 하나에 의지해 일본과 세상에 이야기를 전했다. 그 수요일이 1000번이 되던 날 세워진 소녀상.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범죄를 고발하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할머니들이 이야기해온 시간과 공간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치우란다.

비참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결국 다시 말하고, 다시 들어야 할 것이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으로 끝났다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듣는 ‘관계’를 이어가는 것. 망각의 범죄에 공범이 되지 않는 길이다(이 글은 우에노 지즈코의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에서 도움받았음을 밝힙니다).


2016/04/09 19:15 2016/04/0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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